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
극장에서 보낸 핸드폰 메시지에서부터 극장 앞의 안내 문구까지 흡연, 음주, 전라는 계속 강조되었다. 공연이나 공연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던 나에게는 반복해서 전달된 이 사전 경고 때문에라도 이 장면들에 더 집중해야 할것만 같다. 공연 시작 전 담당 프로듀서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상기시켜주는데, 흔히 듣는 이 한마디가 오늘은 남다르게 느껴진다.
"예술적 표현으로 봐달라."
담당 프로듀서는 두산 아트랩과 무용단에 대한 짧은 소개 뒤에 지나가듯 이 말을 덧붙였지만,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어 전달되는 이 메시지에는 무언가 극장측의 절박한 사정이 숨어 있을 것 같은 궁금증을 만들어낸다.
나에겐 이 삼중적 도발 보다 세 번 이상 반복되는 디스클레이머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적어도 “실험적이고 잠재력 있는 창작품 발굴”이라는 아트랩의 취지에 공감하여 참석한 관객들이라면 이 정도 표현은 받아줄만큼의 마음의 문을 열어뒀을텐데, 극장 측의 조심성이 오히려 그 부분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흡연이나 음주나 노출 그 자체는 더이상 새롭지도 실험적이지도 않은데 말이다.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영화 <겨울왕국>의 엔딩 크레딧에는 어쩌면 더한 디스클레이머가 들어 있었다. 극중 크리스토프가 안나에게 "모든 남자들은 자기 코딱지(boogers)를 먹는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전적으로 크리스토프 자신의 생각이지 제작자나 월트디즈니 사의 견해를 반영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제작진이 어디까지 신경써야 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누군가가 재빨리 포착해냈다. 출처: http://www.pinterest.com/pin/333196072402968864/ |
프로듀서의 ‘예술적 표현’이란 표현은 직전에 읽었던 공연에 대한 또 다른 부대 텍스트인 팜플렛의 한 구절을 정확히 거슬러 간다. 단원 소개란의 한 곳에는 이번 공연 혹은 여기에 임하는 단원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예술가의 ‘틀’을 벗고, 생활인으로서의 ‘몸뚱아리’만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무대 위에는 ‘춤’이 아닌 ‘생활’이 오를 것이다. ‘생활무용’은 예술가로서 전문적으로 습득해왔던 모든 것을 무대 밖으로 추방시키고 기절시킬 것이다. 몸으로 인지되어 생각으로 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접고 본능에 충실한 초감각적인 반응을 내세운다.
공연 전반에 대한 소개글에도 이번 공연은 “예술가로서 전문적으로 습득해왔던, 즉 예술적인 움직임이라고 자부한 것들을 무대 뒤 켠으로 고이 접는 ‘실험’”이라고 되어 있다. 다시말해 이번 공연에서 실험하고자 하는 바는 생활이란 이름의 ‘반예술’이고, 바로 그 생활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흡연과 음주와 노출이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그런데 그걸 다시 ‘예술적 표현’으로 봐달라니 도대체 내가 보고 있는 게 생활인가, 아니면 여전히 예술인가?
노출 장면에서도 다시 한번 ‘반생활적 예술’을 실감하게 한다. 물론 벌거벗은 채로 어떻게든 감춰보려는 몸짓은 생활에 가까운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무용수들의 ‘조각’ 같은 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이며, 벗은 사람은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입을 걸 다 입은 내가 수동적인 위치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한편으로는 그들의 자유를 부러워하게 되는 것 또한 그곳이 무대임을 깨닫게 해준다.
음주 장면은 무용수의 전문적인 움직임이 최소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연 제목에 가장 부합하는 대목이다. 무대 위로 진짜 생활인인 관객들을 불러 들여 소맥을 먹고 춤추게 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물론 오늘 무대 위에 나가 현란한 춤사위를 보여준 그 관객의 몸과 마음가짐은 나와 동류의 생활인이라기 보다는 공연자의 동료 예술가일 확률이 더 높아 보인다. 아무튼 가장 생활인 다운 이 장면은 <생활무용>이라는 공연을 갈무리하기에 적당한 테마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같은 이유에서 ‘예술적 표현’이라는 성격은 약화되고 마는데, 특히나 싸이가 이 ‘기술’을 세계적 관심사로 만들어버린 현 시점에서는 더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