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4일 금요일

[두산아트랩3] 비빙의 젊은 연주자들이 바라본 굿

비빙의 젊은 연주자들
"굿을 바라보는 3인의 시선"
1월 23일 두산아트랩 쇼케이스



by 에스티

공연 시작 전부터 덧마루 여섯 널을 붙여 만든 무대 위에는 장구, 징, 해금등의 악기들이 악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마이크와 스피커 및 음향 장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통’ 악기와 ‘첨단’ 전자 장비가 함께 놓여져 있는 모습에서부터 과거와 현재는 만나고 있었고, 이 모습은 ‘젊은’ 연주자들이 굿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제목의 이 공연에 대한 하나의 은유적 오브제로 기능하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극장에서 왜 마이크가 필요할까’라는 의문은 마지막 연주에서 풀렸다. (사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소리가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 신원영은 자신이 주도한 푸너리에서 사용한 기법이 ‘샘플링’이라고 소개했는데, 장구나 징에서 나온 소리를 기계를 이용해 곧바로 녹음한 다음 이 소리를 재생하면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이런 식으로 여러 악기 소리를 중첩시켜 크고 복잡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신통방통한 대목이었다. 클럽에서 디제이들이 해야할 것 같은 이 일을 장구로 동해안별신굿의 그 복잡한 장단을 치면서 해내는 그의 재주가 그저 놀라웠다.


공연이 끝나고 되짚어 보니 샘플링이란 기법이 이 공연 전체에서 두루 사용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부분에서는 진도 씻김굿과 함께 무속인들의 소회가 담긴 육성 나레이션으로, 두번째 올림채 장단에서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 혹은 설법을 가려 뽑는 방식으로 병치는 이어진다. 더 나아가 여러 지역의 무속 장단에서 몇가지를 뽑아 청신-오신-송신이라는 굿의 기본 구조로 이어붙인 공연 전체의 형식 또한 일종의 샘플링, 혹은 샘플러라 부를 수 있다.

이 세 젊은 연주자들이 굿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학구적이었다.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그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굿에 대한 ‘스터디’의 결과물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배우고 익힌 굿 음악을 차치 하고라도) 무녀의 삶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과 무속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관점, 그리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무속에 대한 편견을 고발하는 사회비판적 태도가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수 있다. 어쩌면 굿(음악)은 머리로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속에서 경험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체득해야 마땅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굿이라는 종교 혹은 문화는 공연자도 관객도 공부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낯선 대상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이 극장에서 실험될 필요도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자.


마지막으로 대화 시간에 했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덧붙이고 싶다. 연주자의 문제의식에 매우 공감하고 이것이 우리 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굉장히 의미 깊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연주자 자신이 인정한 것처럼 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민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늘 공연에서 부각된 그 특정 종교인이야 말로 무속과 기독교를 접목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연이 유력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냉소나 기성 종교의 메시지를 압축하여 병치하는 것은 별로 효과적인 접근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이 종교간에 유사한 가르침이 있는 걸 몰라서 생기는 건 아니다. 또한 무속에 대한 편견과 반감이 서구화 근대화 과정에서 증폭된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 반무속적 편견은 무속이 주류 민간 신앙이던 시절에 편만했던 여러가지 내적 모순과 문제점들로부터 생성되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한다.

세습무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굿 음악을 학습한, 심지어 스스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근대적 예술가들이 굿 음악을 옹호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또 다른 실험으로 접근 경로를 다르게, 어쩌면 좀더 범위를 좁히는 건 어떨까? 무속이 여타 기성 종교들과 동등한 진리를 설파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연주자들에게 주어진다. 대신 굿 음악이 다른 종교의 음악만큼이나 뛰어나고 몇몇 종교의 음악보다는 더 월등한 미학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연주자들의 기량으로 볼 때 무대에서 충분히 입증가능할 것이다. 굿을 바라보는 단계를 넘어 굿(음악)의 미적 탁월함을 관객에게 더 전달할 수 있다면 연주자들이 바라는 인식의 변화도 낙관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