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9일 수요일

[한토끼의 문화잡식 1] 엑소(Exo)의 성공을 보며 생각하는, 스엠(SM)의 영광과 비극

by 한토끼


2012년 엑소 케이(Exo-K)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SM(SM 엔터테인먼트. 이하 스엠)이 드디어 감이 떨어졌구나 했다. 엑소플래닛(Exo-Planet: 태양계 외행성)에서 온 애들에다가 초능력 컨셉이라니... 농담이겠지. 그러나 무대에서 진지하게 라틴어로 아그네스 마그네스를 외치며 흔히 말하는 에셈피(SMP: SM식 퍼포먼스)를 장엄한 선율로 보여주는 걸 보니 정말 미는 콘셉트인 것이 아닌가. 그렇게 엑소케이는 범접치 못할 분위기를 휘감고는 코어한 팬덤 인기와 대중적 비웃음을 얻고 사라졌었다. 그리고 일년 후, 엑소 케이와 엑소 엠으로 나눠져 있던 멤버들을 합체시켜 돌아온 완전체 엑소는 놀라운 앨범판매량과 함께 대중적 인기까지 올리며 2013년의 가요계를 휩쓸었다.

Exo-M, Exo-K로 나누어 활동한 첫 데뷔앨범 [MAMA]의 MV 중 한 장면.
http://www.youtube.com/watch?v=KH6ZwnqZ7Wo

이 결과에 대하여 언론이나 네티즌들은 결국 스엠의 계획이 먹혔다. 엑소의 초능력 컨셉도 훌륭한 전략이었다 등으로 평가하며 스엠의 승리를 인정하고 있다. 포카(멤버들의 포토 카드. 따조처럼 랜덤하게 13개가 들어있다.)로 팔았든 사인회(앨범을 사면 추첨해서 사인회에 갈 수 있다.)로 팔았든 나누어서(엑소의 앨범은 기본적으로 한국어버전과 중국어버전 두 가지이다.) 간에 이 앨범 불황기에 1,430,000 여장이라는 앨범판매량이다. 팬덤도 어마어마해져서 또다시 에셈의 농노가 되었다는 왕년 수니들의 한탄이 엑소 플래닛까지 닿았다는 평이니 그럴 만도 하다. 스엠은 최초의 아이돌 판을 견인한 기획사답게 3세대 아이돌을 성공적으로 탄생시킨 셈이다. 스엠 역시 엑소에 투자한 바가 크다. 5년 만에 고심하여 만들어낸 남자 아이돌 그룹이 엑소이다. 그런데도 야심차게 데뷔 티저만 12편을 풀며 준비한 첫 앨범 MAMA는 스엠이라는 메이커에 비해 빈약한 성과를 거두었고, 엑소는 2013년 완전체로 복귀하기 전 1년간의 긴 재준비 기간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다시 낸 앨범 [으르렁]의 히트 중에야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었다니 스엠에서도 엑소의 성공을 위해 기나긴 절치부심의 기간을 가졌을 것 같다. 엑소의 성공에 이르기까지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일단 그렇게 준비하고도 왜 그리도 부끄러운 초능력을 주어서 데뷔시켜야만 했을까부터가 궁금해지는데.... 당시 2세대 아이돌들의 끄트머리에서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던 아이돌 시장의 특색을 먼저 살펴볼까 한다.

멤버들의 초능력에는 멋진 로고도 있다.


1세대 아이돌에서 3세대 아이돌에 이르기까지


엑소를 3세대 아이돌이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있는데, 그럼 1, 2세대 아이돌들은 누굴까.

일단 1세대 아이돌들은 아주 쉽고 당연하게 1990년대 후반부터 아이돌 시장을 연 최초의 아이돌들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키운 대중가요 시장을 넘겨받아 등장한 HOT, 젝스키스, 신화, 핑클, SES의 시대로, 에스엠(SM)과 대성(DSP)이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2세대 아이돌의 시작은 그 기준은 정확치 않지만 대체로 2004~5년경, 1세대 아이돌들이 해체하거나 수명을 다하여 부진해지고, 새로운 그룹들이 나오기 시작한 무렵으로 본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F(x), 샤이니, 빅뱅, 원더걸스, 2PM, 2AM 등이 2세대 아이돌에 속한다. 이 시대에는 새로운 기획사 YG와 JYP가 시장에 뛰어들면서 아이돌시장에 명백한 삼파전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2세대 아이돌 시기는 소위 ‘한류’와 ‘K-pop’이 위세를 떨치며 많은 해외 팬덤이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반에는 2세대를 이끌던 대형 아이돌 그룹들의 위세가 약해지면서 비스트, 인피니트, 틴탑, 빅스 들이 그 자리에 들어왔다.

2세대 아이돌의 삼국시대와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면서, 아이돌은 한국 가요계의 한 축이자 K-pop으로 랜선이라는 21세기의 축복을 타고 해외 팬들까지 넘볼 가능성을 지닌 확고한 시장이 된다. 팬덤에는 문화와 법칙이 자리 잡히고, 일반 고등학생이라면, 한 아이돌의 한 팬이 되는 것이 아이덴티티인 것처럼 일상에 자리한다. 한국에서 좀 안되더라도 괜찮다.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에서 외화벌이를 해도 톡톡한 수익을 얻을 수도 있다. 기본적인 수요가 자리 잡혔으니 대형 기획사인 SM, DSP, YG, JYP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획사들도 키워낸 아이돌들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 결과 아육대(아이돌 육상 체육대회)에 출전한 아이돌 그룹 멤버 수는 100명을 넘는다. 물론 아육대에 발을 넣어보지도 못한 채 소리 소문 없이 명멸한 아이돌의 수는 더 많을 것이다. 한국의 특산품을 아이돌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아무튼 이러한 기간 속에서 결국 아이돌을 키워내는 노하우와 시스템 역시 한국 가요계와 기획사 사이에 자리 잡혀갔다.

  따라서 수많은 아이돌이 나오던 2세대 아이돌의 끝 무렵에, 살아남기 위해 각각의 아이돌들이 가져야할 덕목 중 하나는 확실한 “콘셉트”였던 것 같다. 음악중심 방송에 4분 출연하더라도 소비자의 눈을 붙잡을 개성이 더욱 필요해진 것이다. 그저 상큼 발랄하고 끼를 보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런 아이돌들은 너무나 많아졌다. 각각의 아이돌들은 자신이 어떤 성격인지를 한번에 각인시켜야했다. 2PM은 짐승돌이라는 닉네임을 걸고 아크로바틱을 선보였다. 스엠 역시 기본적으로 소녀와 소년의 이미지를 깔고 있던 소녀시대, 샤이니 등의 후속 작업들에서 앨범마다 콘셉트가 뚜렷이 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앨범이나 무대 콘셉트에 그치지 않고 확장되기도 하였다. 아예 뱀파이어 콘셉트를 아예 멤버들 자체에 씌우며 강한 개성과 퍼포먼스로 주요 기획사가 아님에도 확실히 새로운 아이돌을 인지시킨 ‘빅스(Vixx)’의 케이스가 이를 입증한다. 아이돌에 대한 기획이 연예인으로서의 자체적 재능만큼이나 중요해진 시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2014년 1월 25일 토요일

[두산아트랩] 굿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

by 백인경


한국 전통 무속 신앙인 무교(巫敎)를 하나의 종교로 볼 것인가 하는 데는 여러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것의 제의 양식인 굿은 집단적 신명의 분출 방식으로 여전히 우리 문화 곳곳에 남아있다. 특정 종교를 떠나 하나의 전통 문화로 접근한다면 음악과 춤, 그리고 개개의 염원과 기원이 어우러져 하나의 신성을 이루는 굿의 현장은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짜 제대로 된 굿판을 체험하기는 힘든 시대가 되었으며, 굿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무지한 관객의 입장에서 <굿을 바라보는 3인의 시선>의 쇼케이스를 지켜보았다.

비빙(Be-Being)의 젊은 연주자들이 모여 그들 나름의 시선으로 해석한 굿을 무대 위에 펼쳐 놓았다. 그들의 굿판은 무대 한켠에 걸린 커다란 봉제 인형에 무녀 의상을 입히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 행위는 마치 혼을 맞이하는 듯 느리고 그러나 정갈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숨 죽여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한 공연은 그들의 연주와 다양한 영상, 그리고 무녀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쇼케이스가 진행되는 60분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때문이었을까? 굿은 물론이며 전통 음악에 대해 무지한 이 관객은 어떤 호흡도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공연 전에 나눠 받은 안내문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연주자가 해석한 굿에 대한 이야기가 각기 독립된 무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해서 그랬던 건지, 최소한 이 공연을 감상하기 위해선 굿에 대한 내 나름의 이해가 필요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 신명을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받아들이기에 무대와 객석이 나뉘어진 블랙 박스라는 공간이 내겐 너무도 경직된 곳이라 그랬던 건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굿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고민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내심 미안한 마음 마저 들었다.


굿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라보는 시선. 극장을 돌아서면서,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음악 공연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남겨졌다. 이 공연에서 음악 외적인 부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나레이션으로 삽입된 무녀들의 인터뷰와 여러 종교적 메세지들을 편집한 영상은 그저 소리에 속하는 것일까? 해석을 요구하는 혹은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로 읽혀야 하는 것일까? (영상에 자막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미처 안경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혹시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심 불안해졌다.)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 이외에 무대 위에 셋팅된 다른 오브제들은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와 어떤 의미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공연이 끝나고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 공연이 굿에 대한 그들의 오랜 워크샵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질의와 응답을 통해 그들의 고민에 조금 더 가까이 귀 기울일 수 있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이 공연에 대해 내가 취했어야 했던 하나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굿은 접근하기에 따라 종교, 의식, 음악, 연행, 문화, 그리고 어떤 초자연적 에너지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채로운 특성이 굿을 매력적인 탐구 대상으로 만들지만, 그 연구에 대한 결과물이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질서와 형식으로 재립되어야만 할 것이다. 공연이라는 장은 이 다채로운 특성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구취하기에 얼마나 마침맞은가. 이번 쇼케이스를 통해 그들의 고민과 해석을 엿볼 수 있었기에 나아가 본 공연에서 그 고민과 공부의 단계를 넘어선 그들만의 신명나는 무대 한판이 기대된다.

함께 읽기: [두산아트랩3] 비빙의 젊은 연주자들이 바라본 굿 by 에스티

2014년 1월 24일 금요일

개리의 <조금 이따 샤워해> MV가 안타까운 이유

by 시뫄




얼마 전 리쌍의 래퍼이자 작사가인 개리의 첫 솔로 앨범이 나왔다. 어려웠던 시절을 “벚꽃처럼 잠시 피고 졌다”고 추억하고 (‘회상'), 연인에게 “너에게 난 사랑이자 때로는 아픈 가시”라고 고백하던 (‘너에게 배운다’) 리쌍의 노래를 떠올리며, 나는 다른 힙합 음악보다 그의 가사와 랩 방식에 특별히 더 서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고, 방송을 통해 본 개리의 이미지는 친근한 외모, 세련된 유머감각과 적절한 겸손함, 즉 이 시대 ‘훈남’의 미덕을 모두 가진 남자의 그것이었다. 개리의 음악와 뮤직비디오를 전혀 듣거나 보지 못한 상태에서, 곽정은 기자(https://twitter.com/ohitwaslove)가 앨범의 타이틀곡인 '조금 이따 샤워해'의 뮤직비디오에 대해 “미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평한 코멘트가 소위 ‘디스’라고 여겨지며 꽤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뉴스를 먼저 접했다. 곽정은 기자는 코스모폴리탄의 피쳐디렉터, 섹스 칼럼니스트이자 현재 가장 핫한 연애, 성 관련 토크쇼인 <마녀사냥>(JTBC)에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며, 젊은 여성들의 성 관련 전문가로도 불릴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미학’을 운운하며 개리의 뮤직비디오를 비판했다면, 분명 여성의 입장에서 불편하다는 것을 예술의 문제로 돌려서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개리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거부감을 느꼈을 여성이 곽정은 뿐만은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모든 남성들이 이 뮤비를 반겼을까? 이게 단지 이 뮤직비디오의 선정성 때문일까? 리쌍의 이전 뮤비 역시 19금 판정을 받은 바 있는데다가(‘TV를 껐네’), 그렇다면 UV의 '설마 아닐거야' 뮤직비디오(http://www.youtube.com/watch?v=1xKy_6QUibQ)의 선정성은 어떤가. 가사마저 대놓고 성적인 UV의 그 뮤직비디오가 비록 방송사에서는 부적합 판정을 받았을지언정 대중에게는 큰 거부감 없이 (혹은 상당한 호응과 함께) 수용되었다는 사실에는 단지 성적인 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해학성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키치’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캠프’인 예술 양식 - 수잔 손택에 따르면 키치가 순진한 캠프, 즉 그것이 세련되지 않다는 사실에 무지한 상태라면, 의도적 캠프는 키치의 전복적인 형식으로서 키치한 것에 대한 개념들을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미학이다 - 으로 '설마 아닐거야'의 뮤직비디오가 이해될 여지가 있다면, '조금 이따 샤워해'의 뮤직비디오는 심지어 ‘세련되지 못한’ 것마저 오히려 그 반대로 꽤나 고차원적인 예술로 볼 수 있게 해주는 키치의 기준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하지만 '조금 이따 샤워해' 뮤직비디오가 범한 가장 큰 오류는 Benny Benassi의 'Satisfaction' 뮤직비디오(http://youtu.be/V5bYDhZBFLA)를 패러디하거나 그것에 대한 오마주로서 연출한 것도 아니라 그저 일부 베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원작을 비틀고 조롱함으로써 희화화하는 것인 패러디나 원작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방식인 오마주, 그 어느 쪽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답을 베끼는 학생들이 종종 그러듯이, 개리의 뮤직비디오는 'Satisfaction' 뮤직비디오가 가진 매력의 핵심을 놓치고 말았다. 두 작품 모두에서 몸을 노출한 섹시한 여성들이 연장을 사용하는 모습, 혹은 노동하는 여성의 신체가 클로즈업 되고 반복적으로 비춰지는 등 감각적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Satisfaction'에서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몸을 스스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주체들로 보인다면, '조금 이따 샤워해'에서의 여성들은 소비되고 대상화되는 성으로서의 몸, 즉 철저히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몸만을 가진다. 전자에서 아주 강하게 제시했던 여성성을 후자에서는 그 반대로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더군다나 전자에서는 여자 모델들의 아무리 수위 높은 노출이라도 그 시각적 자극이 Benny Benassi의 리듬과 어우러져 공감각적인 경험으로 이어지지만, 후자의 비주얼은 개리의 노래와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음악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뮤직비디오를 본 후 개리의 노래를 ‘듣기 위해’ 다시 음원을 재생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이 뮤직비디오가 그것의 목적 혹은 기능에 합당한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의구심은 개리의 뮤직비디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뮤직비디오가 음악에 대한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예술형식으로 시작해서 1980년대 MTV의 설립 이후 점차 독립적인 예술장르로 발전해왔다면, 현대의 뮤직비디오는 큰 부분에 있어서 상업적인 목적, 즉 마케팅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라디오보다는 비디오의 시대인 지금, 뮤직비디오는 대중이 음악을 더 풍부하게 감상하고 아티스트의 음악외적인 감각이나 표현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식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개리의 이 뮤직비디오는 그저 자극적이며 사람들과 언론의 이목을 끌기 위한 노이즈마케팅 수단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미 음악으로도 인정받았고 예능방송으로도 대중적 인지도가 충분한 개리가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다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현상태가 안타깝고, 만약 정말 이 뮤직비디오가 순수하게 개리의 예술적 창의성의 결과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참 안타까운 일이겠다.


[두산아트랩3] 비빙의 젊은 연주자들이 바라본 굿

비빙의 젊은 연주자들
"굿을 바라보는 3인의 시선"
1월 23일 두산아트랩 쇼케이스



by 에스티

공연 시작 전부터 덧마루 여섯 널을 붙여 만든 무대 위에는 장구, 징, 해금등의 악기들이 악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마이크와 스피커 및 음향 장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통’ 악기와 ‘첨단’ 전자 장비가 함께 놓여져 있는 모습에서부터 과거와 현재는 만나고 있었고, 이 모습은 ‘젊은’ 연주자들이 굿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제목의 이 공연에 대한 하나의 은유적 오브제로 기능하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극장에서 왜 마이크가 필요할까’라는 의문은 마지막 연주에서 풀렸다. (사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소리가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 신원영은 자신이 주도한 푸너리에서 사용한 기법이 ‘샘플링’이라고 소개했는데, 장구나 징에서 나온 소리를 기계를 이용해 곧바로 녹음한 다음 이 소리를 재생하면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이런 식으로 여러 악기 소리를 중첩시켜 크고 복잡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신통방통한 대목이었다. 클럽에서 디제이들이 해야할 것 같은 이 일을 장구로 동해안별신굿의 그 복잡한 장단을 치면서 해내는 그의 재주가 그저 놀라웠다.


공연이 끝나고 되짚어 보니 샘플링이란 기법이 이 공연 전체에서 두루 사용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부분에서는 진도 씻김굿과 함께 무속인들의 소회가 담긴 육성 나레이션으로, 두번째 올림채 장단에서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 혹은 설법을 가려 뽑는 방식으로 병치는 이어진다. 더 나아가 여러 지역의 무속 장단에서 몇가지를 뽑아 청신-오신-송신이라는 굿의 기본 구조로 이어붙인 공연 전체의 형식 또한 일종의 샘플링, 혹은 샘플러라 부를 수 있다.

이 세 젊은 연주자들이 굿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학구적이었다.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그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굿에 대한 ‘스터디’의 결과물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배우고 익힌 굿 음악을 차치 하고라도) 무녀의 삶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과 무속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관점, 그리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무속에 대한 편견을 고발하는 사회비판적 태도가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수 있다. 어쩌면 굿(음악)은 머리로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속에서 경험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체득해야 마땅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굿이라는 종교 혹은 문화는 공연자도 관객도 공부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낯선 대상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이 극장에서 실험될 필요도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자.


마지막으로 대화 시간에 했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덧붙이고 싶다. 연주자의 문제의식에 매우 공감하고 이것이 우리 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굉장히 의미 깊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연주자 자신이 인정한 것처럼 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민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늘 공연에서 부각된 그 특정 종교인이야 말로 무속과 기독교를 접목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연이 유력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냉소나 기성 종교의 메시지를 압축하여 병치하는 것은 별로 효과적인 접근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이 종교간에 유사한 가르침이 있는 걸 몰라서 생기는 건 아니다. 또한 무속에 대한 편견과 반감이 서구화 근대화 과정에서 증폭된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 반무속적 편견은 무속이 주류 민간 신앙이던 시절에 편만했던 여러가지 내적 모순과 문제점들로부터 생성되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한다.

세습무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굿 음악을 학습한, 심지어 스스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근대적 예술가들이 굿 음악을 옹호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또 다른 실험으로 접근 경로를 다르게, 어쩌면 좀더 범위를 좁히는 건 어떨까? 무속이 여타 기성 종교들과 동등한 진리를 설파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연주자들에게 주어진다. 대신 굿 음악이 다른 종교의 음악만큼이나 뛰어나고 몇몇 종교의 음악보다는 더 월등한 미학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연주자들의 기량으로 볼 때 무대에서 충분히 입증가능할 것이다. 굿을 바라보는 단계를 넘어 굿(음악)의 미적 탁월함을 관객에게 더 전달할 수 있다면 연주자들이 바라는 인식의 변화도 낙관할 수 있지 않을까?

2014년 1월 18일 토요일

1482년, 파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이 글은 2013년 <노트르담 드 파리> 재공연에 맞춰 쓰여진 글입니다. 



1482년, 파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There’s Something about Paris in 1482)
: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by 이우정



2013년 올해, 서울에서 여러 번의 파리Paris를 만났다. 핏빛 혁명으로 안타까운 삶이 드러나는 도시 파리를, 대도(大盜)가 누비는 물에 젖은 도시 파리를, 듀티율이 벽을 넘어 드나드는 도시 파리를, 유령의 사랑이 남아있는 도시 파리를.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은 이 도시는 무대 위에서 노래와 사랑으로 다듬어져 날마다 아름다워져 간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의 ‘아름다운 도시 파리’를 노트르담 성당에서 만난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1998년 파리의 팔레 데 콩그레에서 초연된 프랑스 뮤지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에 프랑스 배우들의 내한공연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우리 배우들로 무대화 되었다. 그러니 거의 20년 전에 태어난 이 작품은 대략 10년 넘게 회자되고 사랑받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다시 2013년에 돌아와 해를 바꾸어 내년에도 이어갈 예정이다. 뮤지컬을 보고 즐김에 있어서 저런 숫자며 국적을 묻고 따짐이 무슨 상관인가. 곱지 않은 물음이 되돌아 올 수 있다. 하지만, 분초의 단위로 유행과 기호가 휩쓸어 들고나는 현재에도, 시간 앞에 퇴색되어 스러지지 않고 고스란히 감동을 전하는 작품인 <노트르담 드 파리>에게는 이러한 숫자며, 말들이 결코 의미 없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트르담 드 파리>의 지속적인 힘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더해 고민할 때 이러한 작업은 더 이유 있는 국적묻기와 나이세기가 된다.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두산아트랩2] 안은미 세컨드 컴퍼니의 '19금' <생활무용>

by 에스티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극장에서 보낸 핸드폰 메시지에서부터 극장 앞의 안내 문구까지 흡연, 음주, 전라는 계속 강조되었다. 공연이나 공연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던 나에게는 반복해서 전달된 이 사전 경고 때문에라도 이 장면들에 더 집중해야 할것만 같다. 공연 시작 전 담당 프로듀서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상기시켜주는데, 흔히 듣는 이 한마디가 오늘은 남다르게 느껴진다.



"예술적 표현으로 봐달라."

담당 프로듀서는 두산 아트랩과 무용단에 대한 짧은 소개 뒤에 지나가듯 이 말을 덧붙였지만,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어 전달되는 이 메시지에는 무언가 극장측의 절박한 사정이 숨어 있을 것 같은 궁금증을 만들어낸다.

2014년 1월 14일 화요일

‘사랑하기 때문에……’

뮤지컬 <베르테르>

by 이우정


그로부터의 편지가 닫혔다.* 이내 마음을 흐르는 또 하나의 음악이 떠올랐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한 줄의 유행가가 마음과 마음을 더 잘 전달하기도, 공감의 농도를 짙게 하기도 한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그녀의 해맑은 미소면 되었다. 그는 그렇게 바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어오던 미소가 그에게는 힘겨웠다. 결국 그는 삶과 사랑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슬픈 청년 베르테르의 이야기다. 독일의 대문호(大文豪)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무대화 한 뮤지컬 <베르테르>가 작년에 이어 다시 돌아왔다. 첫 사랑처럼 잊지 못하고, 오래 두고 보아야 할 작품이 다시 공연되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더해서 일 년의 지난 시간 동안 새롭게 해끔한 모습으로 단장하여 돌아와 준 것에 고맙기까지 하다. 다시 돌아온 그대, <베르테르>,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다.

2014년 1월 11일 토요일

[두산아트랩] 양손프로젝트 <오셀로> 쇼케이스

양손프로젝트 <오셀로>
by 에스티


두산아트센터의 창작지원프로그램 두산아트랩이 시작되었습니다. 아트랩은 일종의 중간 보고회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그래서 아직은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하나의 공연이 완성되는 중간 단계를 (예비) 관객들과 공유하고 여기서 나온 피드백을 통해 최종 버전에 반영하는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필자는 이번 아트랩의 모니터 회원으로 선정되어 전체 공연을 볼 예정입니다. 첫 공연을 보고 글을 쓰지만, 공연 기간이 짧은 탓에 글은 공연이 끝난 후에 공개될 수도 있는 점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아침에 난생 처음 충치 치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선 치과에 별로 도움되지 않는 건치라고, 그런데 왜 그 어금니만 그렇게 썩었을까라면 의아해 하셨다. 생각해보면 오래 전에 이미 그 부위에 충치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그냥 방치해 뒀던 게 화근이었다. 그러나 잘 보이지도 않고 통증이 있지도 않은 어금니를 일부러 쳐다볼 일은 거의 없었다.

마취 주사를 맞았다. 잇몸에 바늘이 들어가니 아픈 게 당연하겠지만 마취 주사라는 게 원래 그런건지 주사약이 들어가면서 바로 마취가 시작되어서인지 약간 따끔하더니 이내 감각이 없어진다. 잠시 후 얼굴에 수건이 얹어지고 연장들이 입 속으로 들어가더니 공사장에서 돌 갈아낼 때 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따금 골이 울릴 정도의 진동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통증은 없다.

이처럼 마취라는 건 마술과도 같다. 아직 절반 이상은 남아 있는 생니가 갈려 나가는 순간에도 통증이 없고, 치료가 잘되어서인지 마취가 깨고 나서도 별로 아프지 않다. 그러나 이가 있던 자리엔 어느새 나로선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물질이 채워져 있다. 한동안 나라를 떠들석하게 한 우유 주사라는 마취제 또한 비슷한 마술을 부린다. 듣자하니 이 주사를 맞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고 그래서 깨고 나면 피로한 몸에 상쾌함이 채워져 있다 한다. 다만 문제는 이 약품을 피로회복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점인데, 여기서도 또 다른 마술이 펼쳐진다. 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몇몇 여자 연예인이 프로포폴 주사를 맞은 게 적발된다. 그들의 이름은 비밀에 부쳐지고 이니셜로만 나타나는데, 그러면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전국민이 집중하게 되고 결국은 포탈 실시간 검색어에 정답이 표시된다. 그러는 동안 정치 사회적 이슈는 몇 페이지 뒤로 감춰진다. 우유 주사를 온 국민이 맞고 잠드는 일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진다.

베니스의 원로 브라반시오는 (장래) 사위 오셀로가 마술, 혹은 “마약”으로 자기 딸의 마음을 빼앗아갔다고 규탄한다. (… thou hast practised on her with foul charms, /Abused her delicate youth with drugs or minerals /That weakens motion. 1.2.73-5) 브라반시오와 같은 인종차별주의자에겐 오셀로가 마술을 쓰지 않고선 데스데모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불행한 것은 그 사회에 만연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데스데모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부정한 여인으로 전락하고 자신이 사랑한 남자의 손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데스데모나가 등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3막에서 마감되었기에 죽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언데드(undead) 같은 상태에 있다.) 따라서 브라반시오의 대사가 가진 중요성은 뒤에서 오셀로가 당하는 진짜 마술과 마약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으로 볼 때 유의미하다. 물론 이 마술을 베푼 마술사는 이아고이고, 그(녀)는 질투와 의심이라는 치명적인 마취제를 사용한다.

2014년 1월 6일 월요일

지금도 가슴 설렌다는 고백

<지금도 가슴 설렌다>, 이혜빈 작, 손기호 연출, 선돌극장


by 산책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저 유명한 CM송이 어느 날, “에이, 이제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로 바뀌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던 마음은, 이제 말을 해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만에 바뀐 광고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었지만, 조금은 쓸쓸한 마음을 안겼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는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엄마, 아빠, 작은 아빠, 숙모, 옆집 할아버지와 주인공 달리, 달리의 친구가 등장한다. 이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소하다. 사소하고 시시한 그런 일들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심들도 있고,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숨겨진 마음들도 있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그 마음들이 오가고 전해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우습고, 시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을 들킨 것 같고, 조금은 먹먹한 기분도 든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는 고백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 말을 들은 배우의 눈도 순간 빨갛게 되고 말았다.

  아주 오래 전, “진짜 첫 사랑은 너”였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겨울이 오기 직전, 시험공부를 위해 깜깜한 새벽부터 일어나 도서관에 가던 날, 보온 도시락에 넣어진 엄마의 편지였다. 이미 십여년 전의 일이라, 거의 모든 내용이 생각나지 않지만, “진짜 첫 사랑은 너”였다는 엄마의 고백만은 지금도 생각 난다. 그 편지를 읽었을 때 내 기분은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날 그 편지를 읽고, 눈물을 뚝뚝 흘리다 결국 피곤해져서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지금 그 편지는 어디로 갔을까?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가족으로 같이 살아 간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참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일인 것 같다. 단순하고, 복잡한 이 마음들을 <지금도 가슴 설렌다>에서 만날 수 있다. 그들이, 그들 중 누군가가 내 가족처럼 느껴질 것이다. 작은 극장 안에서 여기저기 터지는 울음을 듣고, 울컥하며 움찔거리는 뒷모습들을 보면 안심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행복해지려고 애쓰면서, 때로는 다투면서, 손짓 하나 작은 마음 하나에 크게 실망하고, 감동하면서.

  극 내용은 단순하다. 이렇게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감상에 젖을 만큼 관람자에게 여유를 준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꽤 재미있다. ‘낭독 공연’이라는 형식이 이런 재미를 만들어 낸 것일텐데, 예를 들면 “절뚝거리며 걷는다”고 지문을 읽어 주지만 할아버지는 꼿꼿하고 당당하게 걸어 다닌다든지,대본을 들고 읽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이 분명이 나누어 지는 것, 주인공 ‘달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본을 낭독하지 않고 홀로 움직이며 연기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우리는 지문과 다른 배우의 나머지 행동을 상상해야 하고, 보지 않고도 대사를 할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한데에도, 떳떳하게(?) 무대 위로 올라온 대본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또 대본을 낭독하든, 낭독하지 않고 연기를 하든 흔들림없는 배우들의 모습은 색다른 재미를 준다. 가만히 앉아 대본을 들고 읽을 때에도, 그렇지 않을 때에도 배우는 배우가 아니라 등장인물 그 자체였다. 무대도 거의 텅 비어있고, 배우들은 행동도 하지 않는데, 이 극이 드라마가 되고, 감정이 전해지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며, 과연 연극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의 목소리, 사람의 표정은 정말 강렬한 것 같다. 수많은 연극을 보며 배우의 몸, 배우의 움직임 등에 감탄하게 될 때가 있었는데, 가만히 앉아, 대본을 들고 표정으로, 목소리로 전달하는 폭발적인 감정들은 새롭고, 또 대단했다(대단했다고 한 마디로 설명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연극들이 만들어질까? 이 작품의 배우들, 연출, 작가의 다음 행보도 궁금해진다.

오랫만에 극장을 나서며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년 기획 “장바구니”를 읽고 이 작품을 보고 싶다던 첫 독자과 함께 관람한 작품이었다. 그 글을 읽고, 누구라도 ‘이 연극 나도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이 이렇게나 빨리 이루어지다니! 하지만 나의 기대에 자신의 기대를 얹은 사람과 작품을 함께 본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이었다. 게다가 낭독공연이라니, 보고 나와 서로 민망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불이 꺼지고,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극장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뿌듯하고 배부른 기분이었다. 오랫만에 참 좋은 작품을 봤다. 누구에게라도 또 소개하고 싶다. 극, 연기, 연출, 무대, 그리고 가수들의 콜라보레이션까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공연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작품의 결이 따뜻하고 아름답다. 다행히 26일까지 연장 공연에 들어 간다.


2014년 1월 2일 목요일

"장바구니"를 시작하며

by 산책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일이고, 누군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보면, 어떤 이유로 이 공연을 선택했는지 궁금하고, 살며시 다가가 묻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공연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게는 공연이,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말해주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드라마인의 필진들은 공연을 보고 리뷰를 씁니다. 독자들은 리뷰를 읽고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연극이 영화보다 접근성이 쉽지 않은만큼 공연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읽을 때가 많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공감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우리의 리뷰를 읽고 ‘이 공연을 한 번 보고 싶다.’라는 마음 든다면, 무척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마음으로, 아직 보지 않았지만 이번 달에 예매한 공연들을 소개합니다.

2014년 1월



<지금도 가슴 설렌다> , 1월 26일까지, 선돌극장.

“지금도, 나는, 니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 
극단 이루의 손기호가 연출한 배우-가수의 콜라보레이션 공연입니다. 남산예술센터의 ‘초고를 부탁해’프로그램에서 가능성은 인정받고 발굴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제가 이 작품을 고른 첫 번째 이유는 사실 ‘설렌다’는 말 때문입니다. 설렌다는 말은 그야말로 마음을 살랑살랑 움직입니다.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을 17세 소녀 달리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배우와 가수의 협업, 그리고 연기가 아닌 낭독으로 이루어 지는 무대가 어떻게 구성될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전 손기호 연출의 <김포 사는 분이, 열이, 덕이>라는 작품을 관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무척 마음이 아팠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는 너무 슬프거나, 가족의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여구없이> 1월 15일 ~ 29일까지,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나머진 다 미사여구일 뿐이잖아.”
이 작품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 무대에 대해 궁금한 마음으로 예매했습니다. 초연 작품들은  때때로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무척 신선한 경험이 되기도 합니다. 한국 공연 예술센터에서는 2008년부터 ‘봄작가 겨울무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신춘 문예 당선작을 무대화하고 있습니다.  <미사여구없이>는 2013년 신춘 문예 당성작이고, 지난 11월에 이미 공연되었는데, 그때 놓친 아쉬운 마음에 재공연 소식을 보자마자 예매했습니다. 줄거리를 살펴보니,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닐 것 같습니다. 말꼬리를 잡아 가며 격렬하게 싸우는 두 남녀, 헤어진 지 1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두 남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재치있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제게는 익숙치 않지만, 대학로가 주목하는 배우들이라고 하네요. 

<레드> 1월 26일까지, 예술의 전당 자유 소극장

<레드>는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1970)를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마크 로스코는 추상회화로 유명한 화가인데, 거대한 캔버스를 여러 색면으로 나누어 채색한 작품이 유명합니다(나도 할 수 있을 것같다고 충분히 생각할만한). 그의 작품은 단순하고, 아름다운 색을 보여줍니다. 거대한 붉은 빛의 캔버스 앞에 서 있으면 경건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로스코가 어떤 인물로 그려질지 무척 궁금하고, 로스코를 연기할 강신일씨도 기대됩니다. 2013년 <광부화가들>에서도 화가 역을 하셨는데, 자신의 예술관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장면들이 참 좋았습니다.<레드>에서 보여주실 화가로서의 새로운 모습이 기대됩니다. 배우 강필석은 2007년 뮤지컬 <브룩클린>에서 처음 봤는데 무척 목소리가 좋은 배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배우가 채워나갈 이야기는 에너지가 가득한 무대였으면 좋겠습니다. 
12월 21일에 개막해서 벌써 많은 사람들이 관극한 것 같습니다. 저도 얼른 보러 갈 생각입니다. 
(로스코의 작품을 더 보고 싶으시다면다음의 링크 참고
http://www.pureartspace.com/class.asp?lx=small&anid=62&nid=633)



* 공연을 더 예매하면 업데이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