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비유로 말하라》 : 말함과 들어줌의 새로운 역학

《비유로 말하라》, 유진 피터슨, 양혜원 역, IVF, 2008.
-말함과 들어줌의 새로운 역학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우리는 누구나 전적인 발화자 혹은 청자가 될 수는 없다. 때로는 스스로 발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청자가 되어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나는 성장기에 줄곧 발화자가 되는 편을 좋아했다. 특히 연애를 할 때에는 가관이었다. 이야기가 잘 통하기만 하면 연애를 하곤 했는데 여기에서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건 다시 말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을 말했다.

  그런데 차츰 성장하면서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데 정성을 다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인 만큼 나의 이야기에 힘을 실어 발화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몰입력이 깊어지면서 상대에 대한 친밀감과 공감력이 함께 깊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여 이제는 어느 편이 이야기를 하고 어느 편이 들어주는가라는 일방적인 관계의 지평보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얼마나 들어줄 만큼 깊은가 그리고 또 나는 얼마나 깊은 곳에서부터 발화할 마음이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 말함과 들어줌, 이 두 행위 사이의 일방적인 방향성 혹은 두 행위 사이의 양적 차이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이 두 행위 사이의 쌍방적인 행위 자체에도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는다. 말함과 들어줌, 이 두 행위 사이에 형성되는 질적인 깊이, 너와 나 모두가 ‘아닌’ 우리 사이의 것에 집중한다. 오히려 우리보다는 우리의 ‘사이’, 언어보다는 ‘비’언어가 더욱 신뢰할 만한 것이다.

  이 생각에 도달하니 이야기를 듣는 것과 이야기를 하는 것, 그 행위 사이에는 그다지 큰 차이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야기를 주고받음, 그 안에서 형성되는 충일된 에너지, 어떤 새로운 숨결의 창조, 그것에 몰입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한 에너지에 집중하며 대화를 하고, 강의를 하고 나면, 혹은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나면, 너와 나 사이의 구분, 나와 세상 사이의 구분이 조금 볼품없이 부식되어 있어서 좋다. 관계들 사이의 장막이 남루하게 낡아져 있어서 좋다. 그 형편없는 남루함, 초라함과 낮아짐이 좋다. 그 이유는 그제야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이 맑아져서, 그럼으로 세상과 나, 존재와 가치를 둘러싼 구분들 너머의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신뢰할만한 언어의 형태는 (이를테면) 춤이다. 춤은 순간순간 변화하면서도 변화하는 형체조차 어떠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순간 안에서 솟아오르며, 솟아오른 그것은 오로지 공간과 기억 속에서 이내 사라지고, 다시 다음의 순간을 기다린다. 존재하나 끊임없이 사라지는 춤이라는 에너지는,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발화 에너지이리라. 춤의 에너지를 닮은 또 하나의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시(詩)일 테다. 시와 춤의 공통점은 발화자와 청자, 주체와 상대가 (일상 언어를 주고받을 때의 주체와 상대에 비하여) 덜 가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춤 혹은 시로 소통하는 두 명의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두 명의 사람은 정작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 두 사람이 빚어내고 있는 춤 혹은 시가 돋보인다. 아니 우리 눈에 돋보이는 그것은 춤 혹은 시도 아니며, 춤과 시가 빚어내는 공기의 밀도에 속하는 것이다.

  만일 춤과 시가 가장 온전하고 훼손되지 않은 절정의 소통 에너지라면? 만일 소통의 가장 이상적인 실체가 춤과 시라면? 그토록 소통하고 싶어 하고, 그토록 이해받고 싶어 한 우리의 종착지대가 춤과 시라면? 이 책은 지금의 시기에 내가 당도한 소통과 진실과 화해와 가치의 ‘절정 지대’에 새로운 차원의 길을 제시해 준다. 유진 피터슨이 <비유로 말하라>에서 고찰하고 있는 텍스트는 성경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고찰하는 발화란 인간의 육성에 깃드는 구술 언어의 힘, 그 힘조차도 초월하는 (신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고찰하는 들어줌이란 끊임없이 구조화되지 ‘않은’ 채의 이야기들, 마치 여행 중의 발걸음처럼 자연스럽고도 불확정적인 것들 모두를 걸러냄 없이 받아주는 흔연한 들어줌이다. 말함과 들어줌의 역학 안에 신이 개입되자, 춤과 시의 지대 안에서 맛보았던 소통의 최대치가 다시 한 번 남루하게 부식된다. 황홀함이 초라함이 되는 순간. 최대치라고 믿었던 에너지의 정밀함이 흐리멍덩한 공기가 되어 아무렇지 않게 주변의 것들과 비로소 섞이는 순간.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맑아져서 지금까지의 구분과 정의,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으나, 인간이 신을 바라볼 때(혹은 신을 향할 때) 신을 닮을 수는 있다. 그리하여 신의 기운에 전염된 눈으로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것. 그것은 비단 예술만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시선이다. 학문과 예술과 삶에는 ‘다 알 수 없는 것’을 향한 시선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고 삶을 지속하는 일은 그것의 종착점을 신이라는 단어로 발설하는 것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가려진 것을 보기: 케이티 미첼의 《노란 벽지》

임승태

죽음의 시선

연극 <노란 벽지>에는 샬롯 퍼킨스 길만의 원작 소설에 본래 없던 시 한편이 삽입되어 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방식은 다분히 극적이고 징후적이다. 시를 기억하지 못하던 주인공이 점차 기억을 회복함으로써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2a 30),  이 발견(아나그노리시스)은 안나의 운명을 바꾸는 급전(페리페테이아)을 동반하고 있다. 안나가 처한 상태(신경쇠약)와 원작으로부터 달라진 이 연극만의 결말(안나의 자살)을 놓고 보면, 시에 대한 망각이 중요한 징후이자 복선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사건의 결과를 놓고 보면 “죽음death”이란 마지막 시어는 신경쇠약을 앓는 안나가 이 시를 망각했던 그리고 애써 그것을 다시 기억해내고자 했던 이유가 된다. 원작 소설에서 ‘나’가 벽지 뒤의 여인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종국에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추세를 보여준다면, 연출가는 여기에 시를 망각했다가 다시 발견하는 흐름을 겹쳐 놓음으로써 그 여인이 주인공 자신의 죽음 충동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은 안나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입장에서 극적 아이러니를 확보하고, 이후 그것을 애써 기억하려는 안나의 모습에서 불길한 결말이 다가오는 서스펜스를 경험한다.  이처럼 이 시는 하나의 소설이 연극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마치 제목을 대신하는 첫 행을 의식한 듯, “한줄기 빛”을 제공한다.

한편 시의 마지막 행에는 원작 소설과 이 연극을 매개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시어가 자리하고 있다. 안나가 망각하고 있던 “시선 (the) look”이라는 단어는 시를 다시 기억해내기 전에 이미 벽지 뒤의 여인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혹은 벽지의 문양으로부터 그 죽음의 사자를 읽어내는 망상의 형태로 이미 자리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초점을 잃은 채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망자의 시선을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이 마지막 구절로부터 이 연극이 라이브 카메라, 즉 시선을 조작하고 조정하는 행위를 이끌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수의 역설

2년 전 베를린 샤우뷔네 극장에서 케이티 미첼의 <줄리 아씨>를 보고 나서 나는 블로그에다 “TV 드라마를 좋아하는 한국에서 공연된다면 큰 호응이 기대”된다고 감상을 남겼었다.  케이티 미첼의 또 다른 작품이 올 해 SPAF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예매를 서둘렀지만, 티켓을 확보하고 나니 그제야 한편에 자리한 걱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이런 방식의 퍼포먼스가 다시 봐도 흥미로울까? <줄리 아씨>를 보고 나올 때 옆에 있던 한 관객이 했던 말—“이런 건 한번도 본 적이 없어 I’ve never seen this before.”—이 나에게도 적절한 반응이었다면, 이제 이런 걸 ‘다시’ 보게 되는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제목과 이야기가 바뀌었을 뿐 같은 형식이 되풀이될 위험성이 농후한 연극을 기다리던 나에겐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극장이란 우리말 단어가 여전히 연극 공연장과 영화관을 동시에 지칭할 수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케이티 미첼의 “라이브 시네마 쇼”는 이 둘의 병존과 상호작용을 특징으로 한다. <줄리 아씨>도 <노란 벽지>도 무대가 크게 상하로 구분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매우 사실적인 세트가 펼쳐지는 아래쪽 무대는 배우들의 연기 공간이자 촬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스크린은 바로 그 무대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복수의 촬영 스태프가 카메라를 들고 무대에서 장면을 촬영하면 무대 밖 어디에선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이어 붙여 스크린에 영사함으로써 관객들은 한 편의 연극과 영화를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관객이 촬영 현장과 그 결과물을 위 아래로 동시에 볼 수 있는 환경 자체가 TV 화면 한 켠에서 자주 목격하는 “LIVE” 표식 같은 역할을 하며 현장감을 극대화한다. 여기에 더불어 음향 기사는 이렇게 만들어진 영상이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지도록 필요한 소리를 만들어 덧입힌다. 영화의 효과음이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지만, 그러한 작업이 관객의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흥미가 더해진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연극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 매개 없이 직접적인 것과 매개화된 것들이 경합을 벌인다. 이 광경은 그저 고가의 장비를 이용한 신기한 볼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관객은 마치 대위법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이, 아니면 피카소의 입체적 초상화를 볼 때와 같이, 복수의 채널로부터 전달되는 시청각의 자극에 대해 시종일관 선택하고 종합하면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 공연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찾기 위해서는 무대를 편안하게 관조하는 대신 순간순간 어느 부분에 주목할 것인지를 결정하면서 눈과 머리를 분주히 굴려야 한다.

배우들과 촬영 스태프, 그리고 그것을 교차 편집하는 조정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그 합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경거리(show)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케이티 미첼이 라이브 시네마 쇼를 통해 접근하고자 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라기 보다는 실험적인 연극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구성원의 실수나 기계 오작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라이브 카메라가 사용되는 많은 공연에서 기계 오작동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미스터리는 학교나 사무실에서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연결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도 빈번히 발생하는 일종의 도시 괴담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무대 위의 실수에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투사하게 되면서 긴장이 증폭된다. 그런데 이러한 결함들을, 무대 위에 등장하는 배우 이외의 스태프들과 더불어, 없는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물론 촬영상의 실수나 오작동이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만약 그 실수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결점 같은 것이었다면, 케이티 미첼의 라이브 시네마 쇼는 마치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성공하면 큰 가산점을 얻는 트리플 악셀로 승부하려는 어떤 피겨 스케이트 선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본 첫날 공연에도 작은 실수가 있었다. 찰나였지만 카메라 스태프 한 사람이 맞은편 카메라의 앵글 안에 들어왔고 그래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 순간 관객들은 마치 안나가 벽지 뒤에서 여자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스크린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한 남자를 보고 말았다. 그런데 공연을 곱씹을수록 이 순간이 하나의 망상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카메라를 들고 종횡무진 하는 스태프들을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라 생각하여 지각을 거슬러 ‘없는 것처럼’ 여기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에서는 마치 우리의 관습화된 시선이 물화된 것인 양 그들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을 얻기 위해선 그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스크린은 그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가부키의 구로코(黑子)처럼 그들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배우와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우리의 습관같이 스크린은 그들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돌발 상황이 폭로하는 것은 연극과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 관습이라는 필터를 거쳐 여과된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카메라 스태프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은 앞서 그 스케이트 선수가 점프에서 실패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훈련된, 혹은 관습에 무뎌진, 관객은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하면서 이런 실수를 그저 없는 것처럼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 물론 제작진의 연습 부족을 나무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응시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탈은폐된 이 연극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더 나아가 설령 공연 중에 실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공연을 보는 것이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실수를 기다리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베를린에서 <줄리 아씨>를 볼 때, 나는 더 이상 발표 당시의 긴장감을 기대할 수 없는 스트린드베리의 텍스트에서보다 무대의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영상의 매끄러운 흐름이 혹여 실수나 돌발 사고로 끊어지진 않을까를 긴장하며 보아야 했다. 드라마 외부로부터 만들어지는 이 서스펜스에 주목함으로써 나는 연극을 보는 습관적 태도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케이티 미첼의 카메라는 무대 위에 분명히 있거나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관습적으로 없거나 있는 것으로 여겨 왔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도 우발적으로도 드러낸다. 프로이트를 따라 사소한 말 실수로부터 억압된 무의식을 찾아낼 수 있듯이 우리는 이 연극의 공연에서 발생하는 실수로부터 그 저변에 놓여 있는 문제적 연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려서 보여줌: 스크린의 이중성

<노란 벽지>는 분명 <줄리 아씨>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노란 벽지>에서 카메라와 무대를 활용하는 방식에서는 전작에 비해 더욱 진전된 연출가의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줄리 아씨>에서는 다섯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여 배우의 앞, 뒤, 옆, 위 등 배우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여러 대의 카메라가 배우를 둘러싸고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역 배우와 둘 이상의 부분—뒷 모습이나 손만 비치는 식의—대역이 순차적으로 촬영되고 몽타주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케이티 미첼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매끄러운 영상이 사실은 몸을 조각조각 분할하고 다시 재조합한 분절의 결과임을 폭로함으로써 미디어가 사실임직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하는 조작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은 <노란 벽지>에서도 부분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여기에 초점거리를 달리한 두 대의 카메라가 나란히 하나의 피사체를 촬영하여 서로 다른 화각의 영상이 교차 편집되는 방식이 추가된다. 카메라 사이의 각도가 좁혀짐으로써 마치 관절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더 많은 분절이 일어나고, 그만큼 인물의 모습은 더 섬세하게 포착된다. 카메라의 병치는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운동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위치에서 바라보더라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시선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관객의 시선에 대한 유비를 심화시킨다.

공연 중 간헐적으로 무대 전면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은 <줄리 아씨>에선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전술이다. 이 기간 동안 관객은 가려진 무대를 오직 카메라와 스크린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데, 연극사를 통틀어 이토록 대범하고 노골적으로 제4의 벽을 관객 앞에 노출시킨 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고지식한 제4의 벽은 카메라가 객석 방향을 촬영하기 위함과 같은 기능적인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객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욕실이나 계단과 같이 처음부터 오직 스크린을 통해서만 확인해야 하는 공간도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관객을 문자 그대로 벽 뒤에 배치함으로써 벽지 속 그녀가 관객에 대한 은유임을 드러내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목적이라면 단 한 번으로도 충분할 장난을 연출가는 여러 차례 반복하는 걸까? 관객을 적잖이 성가시게 만드는 이 장치가 노리는 것은 관객이 시선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기 위한 이화(異化) 효과임이 분명하다. 물론 관객 앞에 벽이 가리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고개를 조금만 들면 그 벽 바로 위에 걸려 있는 스크린을 통해 벽 뒤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벽은 여전히 있지만 없는 듯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이중성은 스크린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즉 무언가를 보여주는 막이면서 동시에 가리기 위한 막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스크린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편리한 도구이지만, 이 간편함 때문에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촬영자가 프레임에 담고 편집자가 취사선택한 욕망의 몽타주란 사실을 쉽게 망각하고선 만들어진 영상을 사실로 곧잘 믿어버린다. 이렇게 길들여진 관객의 시선이 미디어를 지배하는 권력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다. 케이티 미첼은 일시적으로 무대를 가림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의 불편과 답답함을 경험하게 한다. 이를 통해 그 잠깐이 불편하다면 미디어에 완전히 포위되어 살고 있는 우리의 삶 또한 진실로부터 얼마나 차단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만든다.

닫힌 본무대가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으로 유도한다고 해서 관객의 시선이 그곳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다. 관객은 이 일방성에 저항하고자 그 동안 열려 있던 본무대 때문에 충분히 주목할 여유가 없었던 주변의 작은 부스들로 시선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 중앙의 작은 부스에서는 한 여성 배우가 내레이터로서 목소리 연기를 펼치고 있고, 우측에는 음향 효과를 만들기 위한 부스가 마련되어 있다. 음향 장치가 무대 전면에 노출되어 있었던 <줄리 아씨>에서 음향 담당자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제공했는데, 그에 비해 <노란 벽지>에서는 부스가 이러한 기회를 차단시킨다. 이런 점에선 부스 또한 음향 기사와 관객 사이에 둘러쳐진 또 다른 형태의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보다 정밀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독립적인 부스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만, 내레이터나 음향 기사가 부스 안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이 공연을 그 출발선에서부터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음향 기사가 라이브로 소리를 만들고 있긴 한 걸까? 그냥 소리를 만드는 시늉만 하고, 실제 소리는 이미 녹음된 것을 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현장에서 만드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우리 귀에 자연스럽게 들리는 저 소리가 사실은 그렇게 믿도록 조작된 소리임을 부정할 방법은 없다. 이 연극은 라이브 공연과 그것을 녹화하고 편집한 영상을 동시에 보게 함으로써 관극 행위 자체를 질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극단적인 동시성과 현장성이 주는 쾌감이 점차 사라질 때, 그 쾌감을 이어가는 동력이 불신을 중지하고 싶은 나의 의지였음 또한 분명해 진다.

스크린 너머로

나는 위에서 일부러 ‘연극’이란 말을 골라 썼다. 왜냐하면 이 공연을 연극이라 부르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 들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라이브) 카메라의 은유는 그 비판의 대상과 수위가 더욱 강력하고 통렬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러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메시지는 현란한 장치 없이 그저 “가난한” 방식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 내용은 없이 형식에만 집착한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형식이 돋보이면 내용을 문제삼고 내용이 뛰어날 땐 형식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비평가가 갖춰야 할 객관적 시각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의 반연극적 편견에 맞서 연극을 옹호하면서도, “비극의 효과는 공연이나 배우 없이도 산출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이후로 얼마나 오랫동안 내용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했던가를 기억해야 한다 (1450b 17-8).  케이티 미첼의 연극은 분명히 공연이나 배우 없이는 산출될 수 없는 어떤 효과에 대한 실험이다. 만약 <노란 벽지>의 문학적 의미가 궁금하다면,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그것도 아니면 간단히 “스파크 노트”의 친절한 해설을 참고할 수도 있다.  소설의 연극화는 그 자체가 형식의 실험이며, 연극에서 소설을 이용하는 것은 내용을 빌어 형식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적어도 소설을 전유하는 연극에서 형식에 매료되고 거기서부터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연극과 영화의 경계선에서도 불만이 들려온다. 이 또한 연극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극의 경계를 허물고 조롱하는 듯한 모습에 대해 불쾌감을 표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이 작품이 다루는 많은 문제들이 연극성에 대해 더욱 깊은 성찰로 이끌지 연극성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조금이나마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케이티 미첼의 잡종적 시도로부터 우리가 환기해야 하는 것은 연극이나 영화 그 어디에도 결코 침해 받아선 안 되는 경계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적 연극이 혹시라도 불쾌했다면 그건 마치 라스 폰 트리에의 연극적 영화 <도그 빌>을 보면서 느낀 쾌감과 한 쌍을 이루는 것 아닐까. 물론 기술이란 언제나 자본의 손을 놓기 어렵다는 점에서 영세한 연극이 거대한 영화와 접목되는 것을 무작정 반길 수만은 없다. 하지만 연극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연극의 잠재력과 범위를 축소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벽지의 색이 하필 노란색이었다는 사실은 다른 곳에선 몰라도 지금 이순간 대한민국에서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것은 작가나 연출가 또는 축제 기획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저 <노란 벽지>가 2014년의 대한민국에 초대됨으로써 만들어지는 돌발적인, 그렇지만 강력한, 의미이다. 전국이 노란 색으로 도배된 세 계절을 지내면서 우리에게는 안나에게 처방된 휴식 요법, 즉 “가만히 있기”가 결코 낯설지 않게 되었다. 상처를 낫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치명적 망상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일으킨 이 19세기 처방을 고집하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이제 찾아 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 방법이 그 옛날 전쟁 통에 서울을 몰래 벗어난 대통령에 의해, 그리고 가라앉는 배를 빠져나가는 선장과 선원에 의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서울 수복 후 부역자로 숙청당했고, 세월호에 남아 구조를 기다리던 승객들과 학생들은 한 사람도 구조되지 못한 채 수장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거의 전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는데, 현실의 카메라와 스크린이 얼마나 투명하게 가려진 무대를 중계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미 60년 전에 라디오는 서울을 빠져나간 대통령이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믿게 만들었으며, 시민들의 지식과 의식이 성숙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미디어가 권력자의 욕망을 몽타주하는 기술도 교묘해졌다. 기성 매체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SNS나 외신을 더 신뢰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전지구적 권력자들의 욕망이 경합하는 모습을 더 자주 만날 뿐이다. 이 연극에서 무대 전면이 통째로 덮이고 스크린만 쳐다 보아야 하는 그 순간을 우리 사회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이 나 혼자만의 지나친 상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SPAF에서 초청한 해외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작품들을 통해 오늘 이 시점의 한국연극이 나가야 할 바를 점검하고 반성하기 위함에 있다. 지난 여름 적지 않은 연극인들도 시민의 일원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에 동참했었다. 연극인들의 참여가 특별법 제정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잠시 극장 밖으로 나왔던 연극인들은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수십 년을 이어온 연극제가 내용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대관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극장 앞에 가로 놓인 거대한 가림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 온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옳다면, 지금 스크린으로 가린 그 어떤 것도 결국은 다른 스크린을 찾아 나타나게 되어 있다.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연극이 필요한 때이다. 애도를 충분히 하지도 받지도 못한 오백여 명의 학부모에게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다면 <햄릿>이라도 하고, 스크린 뒤에서 곪고 있는 상처를 바라보고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이 혁명적이라면 그것은 나라를 뒤집어 엎기를 기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한 인간이 바라보는 방식과 그리하여 사유하는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나는 <노란 벽지>라는 밖에서 온 연극 하나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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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회 젊은비평가상 공모 관계로 게재가 늦어졌습니다. 후보작으로 거론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를 드립니다.
** 드라마인으로 젊은비평가상 공모 지원작을 보내주시면 게재해드립니다. 페이스북 메시지를 이용해주세요.

2014년 12월 4일 목요일

진정한 위로와 힐링이란, 뮤지컬 《하늘아》

by 산책

‘K-Pop 스타 시즌4’에 출전한 이설아 참가자의 <엄마로 산다는 것은>이 요 며칠 화제다. “밥은 먹었느냐”는 엄마의 질문, “홱 닫은 방문”, “과일 한 접시”에 대한 기억들을 가진 사람들, 어느 새 늙어버린 내 엄마를 보고 엄마의 과거를 떠 올려 본 기억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누가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 부르기 시작했을까? 그런 말이 없었다면, 엄마의 삶은 어땠을까?
http://tvcast.naver.com/v/243464 *

이설아 참가자의 영상이 22시간만에 100만뷰를 달성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 낸 것이다. “엄마”는 평범하지만 특별하다. 엄마는 보편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각자의 개별적인 경험을 떠 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마라는 그 짧은 단어는 정말 많은 감정을 담고 있어, 엄마를 소재로 드라마나 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일정 정도 이상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뮤지컬 <하늘아>는 남편을 잃은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딸마저 잃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런 소재는 주 플롯이 아니더라도 많은 드라마에 흔하게 삽입된다. 앞서 말했듯, “엄마”는 어느 정도 성공을 보장해 준다. 엄마와 딸의 행복하고, 친구 같은 관계를 두텁게 보여준 후, 갑자기 딸을 잃게 되는 엄마의 감정을 최대한 보여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다소 뻔한 구성이지만, 관객의 감정 이입이나 공감을 쉽게 끌어 낸다. 특히 뮤지컬 넘버들의 완성도가 매우 높고, 드라마에 자연스럽게 묻어 나면서 극 전체의 정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여전히 생각나는 멜로디나 가사가 있을 만큼 호소력도 높다. 마치 수화를 하듯, 가사를 손으로 설명하던 몇몇 안무만 빼면, <하늘아>는 소극장 창작 뮤지컬로는 크게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블로거들이 감동적이었다고, 눈물을 흘렸다는 후기를 썼다. 엄마에게 잘하자는 다짐도 심심찮게 보인다. 이런 면에서 “감성 힐링 뮤지컬”로 소개되는 문구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수학여행”이란 단어로 시작된 긴장은 ‘가기 싫다는 딸을 억지로 보내는 엄마’의 모습에서 증폭되고, ‘받지 못한 마지막 전화’에서 극대화된다. ‘이제 그만 잊으라’는 주위의 보이지 않는 압력까지 언급되면서 당연하게 ‘세월호’가 떠오른다. 연출과 기획이 이 사건을 염두에 두었음을 숨기지 않으며, 세월호 사건에서 이미 많은 사람이 접했을 법한 에피소드들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과연 이 문제를 이렇게 다루어도 되는 것인지 조심스러우며, 의아하다. 여느 신파조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게 <하늘아>도 예쁘고, 슬프게 가족 간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모성을 다룬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호를 단지 모성, 가족 간의 사랑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일까? 또 벌써 이 문제를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답을 구하지 못하고 여전히 불편한 것은 무엇보다 작품에서 연출이나 작가의 어떤 태도, 입장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출은 “슬픔의 자리에서 함께 하는 것”이 최고의 위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기획은 “갑작스런 가족의 죽음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자고 작품의 의도를 밝히고 있지만, 이 사건을 대하는 창작자의 태도를 읽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유족들이 이 작품을 보러 왔다고 생각해보자. 이 이야기는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벌써 극장에 앉아서 이 이야기를 지켜볼 수 있을지, 가족의 소중함이나 상실감만으로 그들의 심정이 표현될 수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여전히 복잡한 문제들이 남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날의 충격이 옅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문제가 정리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진정한 위로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건네는 것이어야 한다. 타자로서 내가 느낀 슬픔과 내가 흘린 눈물이 과연 당사자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예술가도 사회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게다가 세월호는 단순한 사고로, 또 가족을 잃은 남은 자들의 슬픔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문제이기에 더욱 그렇다. 많은 이들이 함께 슬퍼했고, 분노했다. <하늘아>의 마지막 장면에서 혼자 남은 엄마는 딸이 남긴 CD를 듣는다. 아마 앞으로 저 CD를 수없이 반복해서 들으면서 엄마는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불편했던 관객들에게 주는 실낱같은 희망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살짝만 힘을 주어도 찢어질 것 같이 얇은 막으로 이야기 전체를 마무리한 기분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짝, 그리고 슬쩍 이 문제를 덮을 수 있는 것일까.  ㉦

*방송사의 유튜브 영상 공급 중단으로 인해 네이버캐스트 영상을 링크합니다. (편집자)
**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유가족 부모님들의 이야기가 직접 전해지는 채널이 있습니다. (편집자)
http://youtu.be/S2FMHTdgumI?t=1h4m36s

2014년 11월 23일 일요일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관객과의 대화 (11월 22일)

김재엽 작/연출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 (2014.11.04-30,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11월 22일 공연을 마치고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나눈 질문과 대답을 일부 소개합니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김재엽 연출과 두 배우 (오대석, 김원정) 를 비롯하여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와 시인 맹문재 안양대 교수가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좌측부터 김재엽 연출, 맹문재 시인, 김현경 여사, 오대석 배우, 김원정 배우


백석 시인에 나타난 여인 나타샤 처럼 그런 중요한 의미셨을 텐데, 그게 지금 돌아가신 이후에도 엄청난 추억으로 삶의 힘이 되시는지, 선생님과 사셨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얼마만큼 행복한, 사실은 살아내기가 쉽지 않으셨을텐데, 지금까지의 영향은 무엇인지요.

김현경 여사

김 시인은 하루가 똑같은 날이 없었어요. 매일매일 정말 좋게 말하면 충동적이고 또 그런가하면은 꼭 봄날같이 따뜻한 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같이 같은 날이 없으니까 감동의 연속이었어요. 시에도 나타나지만 시를 똑같은 영감으로 쓰지 않으셨어요. 꼭 시는 그 다음에 쓰는 시는 거기서 벗어나야 된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시 한편을 쓰면 큰 산고를 겪었다 하셨어요. 시를 한편 쓰면은 초고를 쓰고 난 다음에 나한테, “여편네한테”  꼭 필사를 시켰어요. 원고지에다. 근데 하나, 무지무지 섬세하고 깐깐한 양반이에요. 그렇게 충동적이고, 술도 폭음을 많이하신 양반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고쓸 때만은 그렇게나 엄숙했어죠. 딱 옆에다 앉혀 놓고 미리 원고지를 다 준비해놓고, 그 다음에 만년필까지 준비하고, 만년필을 특별히 말하는 건 잉크 빛깔까지도 이 양반을 신경을 씁니다. 잉크 빛깔도 맞지 않으면은 쓰지를 않으세요. 그러니까 그 파이로트 잉크를 사기 위해서 마포에서 충무로 체육관까지 나와야 해요. 그 정도로 준비가 단단해요. 그리고 제가 옆에서 쓰는데 그냥 이거 베껴라가 아니에요. 옆에 앉으셔가지고 내가 그 원고를 보면서 시 제목 쓰고 김수영 쓰고 그 다음 제가 베끼기 시작하면 꼭 한줄 띄고 점찍고 행 바꾸고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거의 다 썼는데 저 같으면 그동안 쓴 게 아까워서 틀린 데만 고쳤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됩니다.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하니까 몹시 힘들 때도 있었어요. 그러니 말하자면 그렇게 엄숙하게 다루시거든요. 돌아가신 지가 벌써 50년이 가까워 집니다. 46주기에요. 저는 46년 동안 반세기를 뻔뻔스럽게 살고 있는 여편네죠. 그래도 아직도 제가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건 47셉니다. 돌아가신 나이가. 그 젊은 나이가 아깝고. 또 하나는 진짜 빈틈없는 공부벌레에요. 공부하는 태도 책읽는 태도 번역하는 태도 시를 쓰는 태도는 생활하고 일치합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남편한테 어리광같은 거 부려본 적도 없어요.  그게 용납이 안되니까. 그리고 그때도 그것이 하나도 괴로움이라든지 무슨 생활고로 연결을 안시켰습니다. 그냥 대단한 양반을 둘도 없는 남편을 모신 데는 게 큰 자랑이었어요. 그 당시에 무슨 동창회 같은 모임에 나가면 야 너 학교 때 꽤 허영심도 크고 그랬는데, 어떻게 지금 이러고 사느냐. 닭을 기른다며 이러면서 무시를 하는 거에요. 그게 반발이 되어서. (그당시에는 1960년대만 해도 김수영은 그저 참여 시인이지 이렇게 위대한 시인이라는 걸 잘 인식을 못해요. 그 당시만해도 서정시 청록파 시인이 으뜸입니다. 그런데 그 양반은 모든 관념이라든지 서정 같은 걸 다 부인하잖아요. 혹시 시 구절에도 조금 낭만적이고 흐름이 좀 조용하고 그래서 내가 옆에서 베끼면서 아 이게 좋다 하면 거칠게 또 고칩니다. 그 당시에 제가 한 말이 있어요.) 그래 내가 김수영 시인하고 사는데, 김수영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시인이야 이렇게 큰 소리를 뻥 쳤어요.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40주기가 2008년도였어요. 그때 그 친구가 그 소리를 듣고 감명을 듣고 신문에서 광고를 보고 신문회관까지 찾아왔어요. 신문회관에서 40주기 학술대회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가 그 말을 다시 확인시켜주더라고요. 그래서 아 내가 참 그런 말을 했지. 그런 긍지로 살았어요. 그러니까 더 없는 감동의 연속이고 정말 나를 이렇게 오늘날까지 지켜주고 또 그 에스프리로 나를 이렇게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는 거. 그러니까 상식적인 행복을 넘어서서 진짜 대단한 행복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섯 분한테 드리고 싶은 질문은 연극 보면 연출자가 배우들과 고민 많이 하면서 만든 연극 같아요. 준비하시면서 혹시 가장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다면 알려주시구요. 연출자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 두개가 있는데, 지난번 알리바이 연대기 때도 재엽님 역할을 정원조 배우가 하셨고, 이번에도 또 하셨잖아요. 혹시 굳이 재엽님의 역할을 정원조 배우에게 맡기시는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하고요. 대사중에 “재엽아 너는 연극을 왜 하냐”이런 대사가 있는데, 이번 연극을 준비하시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원정 배우

저희가 1월에 워크샵을 했을 땐 저도 시대적 배경을 많이 알지 못했어요. 그 당시엔 “거미”라는 시가 저한테는 되게 와닿았습니다.

오대석 배우

대답을 하기 전에 여기 다 계신 분은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어보셨을테고 좋아하시니까 남아계실 것 같은데요. 꼭 발화해서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눈으로만 읽지 마시고 꼭 정답은 없으니까 그날 느낌대로 시를 꼭 소리내어 읽다보면 저도 이번에 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는데, 매일 매일 달라요. 제가 시를 계속 하잖아요. 저의 대사들은 거의다 산문에서 나온 말들이거든요. 이걸 매일 계속 발화를 하다 보니까 그때마다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아요. 최근엔 “저 하늘이 열릴 때”가 그런 거 같은데. 여기 계신 분들은 집에 돌아가셔서 시를 한번 그냥 소리 내서 자기가 가장 편한 곳 있잖아요. 샤워하다가 아니면 술 드시다가 정말 그 시를 만끽을 한다는 건 눈이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말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오거든요. 그게 여러분들 안에 김수영을 찾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현경 여사

남편의 작품 중에서 최고 작품 같다고 생각하는 건 “도취의 피안”이라는 시에요. 그게 정말 시를 쓰는 시의 방법론이라든지 이미지라든지 에스프리라든지 이런 것이 대단히 높은 시로 알고 있습니다. 너무 이미지가 추상적이고 그래서 물어봤어요. 시가 감동이 큰데 정말 누가 흉내낼 수도 없는 정도의 시라 생각하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냐 했더니, 이건 이 양반이 사회주의에 대한 하나의 향수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사회주의라는 게 인도주의에서 왔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양반이 의용군을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돌아와서 정말 사경을 헤매었어요. 정말 죽을 고비를 두 번 이상 넘기면서 살아남은 게 신통하죠. 물론 참여시도 많고 “풀”도 있고 하지만 정말 시작으로서 시 자체로서 평가 받을 때 제가 제일로 생각하는 게 “도취의 피안”이구요. 그리고 또 제가 그렇게 47세에 요절하셨지만 좀 아깝죠. 지금 4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 젊은 나이와 그 공부 벌레, 진짜 시인입니다. 학문도 깊어요. 철학 서적도 칸트서부터 하이데거까지 원서로 읽으시거든요. 노는 걸 못봤어요. 늘 책만 들고 있었지. 그렇게 간단없이 열심히 공부하셔서 그런지 아쉽다고 하는 양반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더 좋은 시를 썼을까. 또 시절에 있어서도 경고를 많이 하셨잖아요.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글은 지금 읽어도 누구한테든지 영원한 시인에 있어서는 교과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서도 제가 생각할 때는 초기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쓴 시 하나하나가 다 완성이에요. 미완성이라는 건 없습니다. 하나하나 다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맹문재 시인

저는 "눈"이라는 시를 제일 좋아합니다. 눈은 김수영 전집에 세 편이 있어요. 처음에 있는 시.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데고 기침을 하자. 눈 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을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뱉자.” 라는 시인데요. 제가 20대 때 김수영을 처음 보면서 저하고 시 같이 습작하던 친구가 저보다 이 시를 먼저 외워서 멋있게 낭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젊은 나이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80년대 상황이니까요. 뭔가 이렇게 망설이고 눈치보고 문학을 한다는 저도 뭔가 이렇게 어떤 사회적 발언을 했을 때 나에게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이런 걸 망설였을 때 친구가 이 시를 담담하게 낭송하는 걸 보고 제가 시쓰는 방향을 새롭게 가져서 외웠던 시입니다. 눈은 기침을 하자는 젊은이 다운 부르짖음도 좋지만, 김수영 시는 철저히 관념을 배격한 시여서 눈이라는 게 어떤 관념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 눈을 보면서 김수영 자신이 눈에게 자신의 마음을 동화 내지는 투사한 인식의 산물이란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이 시를 문학사상에다 내가 읽은 한편의 시에서 그 때도 이 시를 소개하면서 저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김수영의 이 시를 읽으면서 시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시적인것 이런 것이 아니고 자기 눈으로 보고 느끼고 그것을 보면서 자기가 주체성을 가지고 해석하고 나름대로 상징화할 수 있는 것 그런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를 준 시입니다.

김재엽 연출

저는 작품 쓰기 위해 여러가지 시와 산문을 읽게 됐는데, 희곡을 써야 하는데 자꾸 시를 읽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한 때가 많았습니다. 연극에도 나오는데 제가 대본을―   보통 때도 늦게 쓰는 편이긴 한데―많이 지체가 돼서, 과연 김수영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많이 못 찾은 이유 중에 하나도 시를 한번 씩 읽고 나면 약간은 정지상태가 옵니다. 똑바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시인이 계속 이렇게 자기 삶에 대해서 투명해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많이 나와서 그걸 타인을 보면서 자기를 반성하고, 다른 사물을 보면서 자기 마음을 투영하는 힘이 굉장히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강가에서”라는 시가 있는데, 자기 보다 남루해보이는 어떤 사내를 보면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훨씬 힘들어 보이는데, 이 사내가 가지고 있는 생의 어떤 건강한 기운은 도대체 뭘까. 자유롭고 그럴 수 있는 힘은 뭐지 이런 걸 반추하는 건데. 연극하는 것도 사실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서 이렇게 곁눈질 하면서 만들어내는 건데 거기에 내 자신은 얼마만큼 정직한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던져줘서 고민만 하다가 공연이 이렇게 배우들 몫으로 고스란히 올려진 것 같아서 상당히 송구스러운 그런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저보다 훨씬 멋있게 생긴 정원조라는 배우를 캐스팅하게 되었구요. 정원조 배우가 사실은 두번째 제안할 때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는데, 흔쾌히 좋아해주었고 서로 오픈한 상태에서 얘기도 들어줄 수 있는 좋은 친구라서 계속 해서 같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에 끝나고 나서는 어떻게 생각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다음에는 또 얘기를 새롭게 해볼 생각입니다.

저는 시에 대해서도 문외한이고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연극을 사랑하는 청년인데요. 남산에서 하는 연극을 자주 챙겨보고 있는데, 작가님에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시와 김수영시인에 대해 잘 모르는 제 또래 관객층에게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고 싶었는지 그리고 두 번째로 작품 중에 김수영 시인과 강신일 배우의 마지막 장면이죠. 철조망 뒤편에서 마지막으로 휴전협정을 맺은 지 6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는 변한게 없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았는데, 어떤 부분에서 반세기가 지난 이 시대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작품 초반에 광화문 광장이 나오구요. 광장과 청와대 앞을 시를 읽으면서 걷는 행위는, 지금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을 때도 우리는 결국 동시대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읽는다면 그런 모습일 거 같다는 측면에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와 소통을 해보려고 하는 이유가 지금 현재 많은 사회적인 모순이나 갈등들이 50년대 60년대 김수영 시인의 시대들의 갈등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미루고 미루고 못본척하고 지나쳐 온 것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런 것들이 분단이나 한국전쟁 언론의 자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런 부분들이 시인이 몸부림치면서 얘기했던 부분들인데 사실은 우리는 50년이 지나서도 그때 당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거나 혹은 시인이 온몸으로 괴로워 했던 예술가의 모습들이 우리는 어떤 부분은 간과하면서 내가 예술하려고 하는 부분만 생각하고 있지 세상과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메시지라고 할 건 없지만, 이 시대 후배들 혹은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자신을 아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나는 모르고 있다. 혹은 모른다라는 사실 때문에 위축되어서 말 못하고 있는 게 많은 거 같은데, 내가 느끼고 내가 아는 것 만큼 내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느냐, 사실은 그게 큰 문제인거 같고요. 알아야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거 궁금한 건 또 물어볼 수 있는 거고, 그래서 시인한테서 제일 많이 발견했던 게 세상과 맞서 싸우는 투사의 이미지라기 보다도 내 자신한테 얼마만큼 솔직한지 내가 정당하지 못한 거에 대해서 내가 얼만큼 괴로워 할 줄 아는지 자기 양심의 문제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고 혁명을 꿈꾸는 것이 내 양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제일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혁명이란 말도 어릴 때는 사회적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뭔가 부담스러웠는데, 사실은 그게 내 자신을 내가 속이지 않고 지내는 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맹문재 시인

우리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랑 격변의 시대를 온 몸으로 헤쳐나가려고 했던 시인이죠. 그래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김수영 시인이 온몸으로 지향했던 건,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적 모더니티를 추구했던,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했던 시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는 외적인 환경들, 분단이라든가 언론의 자유라든가 기존의 유교적 인습이라든가 제도 이런 것들에 대항하려 했던 거 같아요. 오늘 김현경 여사가 여편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하나의 단어를 통해서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했던 면모를 설명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김수영 시인이 여성을 일컫는 호칭 중에서 여편네가 가장 많아요. 여인 여성 그녀, 영자 등의 구체적 이름도 있지만, 여편네가 제일 많아요. 이 여편네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해서 여기 앉아계신 사모님을 보고 시에서는 여편네라 했지만 시인은 여편네를 하나의 시적인 상징체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만용에게”라는 시가 있어요. 그 시는 양계장을 하면서 경영 적자가 나니까 여편네가 김수영 자신에게 나무랍니다. 계란 값이라든가 모이값을 가지고 나무라는데, 거기에 대항하는 시거든요. 나는 여편네에게 질 수 없다라고 외치니까 언뜻 그 시를 읽어보면 자전적인 이야기여서 사모님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때 여편네라고 하는 것은 그런 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을 가지고 있는 대상인 것이죠. 근데 이 자본주의라는 게 우리가 속물근성으로 따라가는 그런 근대화를 이루어선 안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근대화여야 하는데,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상으로서 여편네라고 칭한 거에요. 그렇다면 만약에 다른 언어로 예를 들어 사장놈이라든가 이런 말도 있는데 왜 여편네라고 했을까라는 것이 궁금한데, 바로 그런 점이 김수영 시인이 공부를 많이하고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하는 나름대로의 전략이죠. 왜냐면 자본주의라는 적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에 대항하는 전략도 단순해선 안되요. 사장 이렇게 쓰면 단순하잖아요. 사장이 어떻다라는 건. 여편네라는 말은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하나는 친밀하죠. 부모 형제보다도 친밀한 말이면서 또 여편네라는 말은 고용주와 고용인처럼 계약관계로 되어 있어요. 이혼을 하면 완전히 남남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여편네라는 말은 아주 친밀하면서도 아주 객관적인 언어인 거에요. 그랬을 때 여편네라는 말을 통해서 그 속성을 자본주의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침투되어 있어요. 우리를 속물근성으로 만들어 주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옭가매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칭할 수 있는 말로 여편네라고 하는 것이죠. 그 대항체로 객관화하니까 그 대항체로서 적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언뜻 읽으면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김수영 시인이 그렇게 자유정신을 지향하고 근대적 시정신을 가지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반여성주의적 언어를 사용했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김수영 시인은 여성을 비하하려 했던 게 아니라 자본주의 속성에 물들어 가는 자신에 순응하지 않고 대항하기 위해 여편네라는 호칭으로 저항하려고 했던 것이죠. 물론 여성주의 입장에서 보면 잠재된 내면의 남성주의적 면이 있다든가, 어디까지나 그것은 반여성주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그건 지나쳐 보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김수영 시인은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 했던 것이고 그것이 관념이나 추상화가 아니라 지금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처럼 철저히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 성찰을 통해서 나가려고 했던 점에서 구체성을 띄고 시적인 힘을 받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김수영의 시어들은 명사들이 많지만 여운이 많이 남고 인상이 짙게 있는데, 그것은 김수영 시인이 쓴 시어들이 명사로 화석화된 게 아니라 다 움직이는 동사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몸으로 한 단어가 시대에 저항하려고 했던 근대화를 지향하려고 했던 산물이 아닐까 그렇게 봅니다.

직접 한번 확인을 해봐야 겠습니다. 그 사모님, 댁에서 김수영 시인이 사모님을 부를 때 여편네란 말을 한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여사

집에서 여편네 소리는 안해요. 여보 소리 제일 많이 한 거 같고요.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죠. 정말 가슴으로 존경할만한 대시인입니다.

 요즘 언론의 중립성도 문제지만 그런 것들이 예술에까지도―광주비엔날레나 부산 국제영화제등 처럼― 침범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작품을 준비하시면서 그런 고민은 없으셨는지요. 그리고 제목이 연극에서는 “내안의 김수영을 찾아서”라고 되어 있는데, 제목을 왜 지금의 시 구절로 바꾸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어느날 고궁에 나오면서”가 제일 강력한 모티브를 주었던 거 같아요. 작은 일에 분개한다는 게 서로가 조금 양립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분개한다는 건 솔직한데  작은 일에만 분개한다고 해서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질문이 저는 결국 그게 그냥 답인 거 같았거든요. 그 말 자체가. 자기 모습에 대해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 문장에서 다 나와버린 것 같아서 그렇다면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인의 모습이 우리한테, 나한테는 있는가. 부제는 그런 면에서 붙여 봤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뭐 이 정도 작품하는 건 아직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요새는 압박을 가하거나 할 때 대놓고 하지 않거든요. 지원금 신청하면 떨어뜨린다든지 6개월이 지났는데 기억하고 있다든지 이런 식으로요. 어떤 일이 있겠죠. 있을 거 같고. 지금도 연극계에서는 연극인들이 세월호 관련해서 천막 농성하고 단식을 길게 하는 바람에, 뭐 꼭 그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화예술위원회 쪽에서 35년동안 멀쩡하게 해왔던 (서울)연극제를 대관 심사에서 떨어뜨린 일도 있습니다. 나란 되게 소심한 사람입니다. 대범하게 잡아가든지 이러면 확 눈에 띄기도 하고 관객도 좀 많이 올 것 같은데,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조선 일보 기자들도 보고 가셨는데 기사는 안써주시고. 사람들한테 대화할 수 있는 브릿지(bridge)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하자고 충동질하거나 제가 뭘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전혀 아니구요. 오히려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길로서 극장이란 게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면, 우리도 사소하게 뭔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정도의 차원이었지 이 작품이 대단한 걸 하는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없었습니다.


최근에 희곡아닌 문학작품들이 연극무대에 많이 올려지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소설을 연극화하고 또는 소설을 낭독하는 공연도 있고, 이번엔 시가 중심이 되는 그런 공연인데, 극작가이자 연출을 겸하시는 입장에서 극작가로서 시가 자신에게 주는 가능성 또는 무게감, 반대로 연출가로서 시가 가진 가능성들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소설을 가지고 연극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김소진 소설가님의 『장석조네 사람들』이란 작품을 가지고 연극을 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내러티브에, 영화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시가 오히려 연극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김소진 소설가의 작품은 대사가 구어체로 방언을 사용하셔서 언어 자체가 그냥 그대로 살아 있었기 때문에 바로 연극이 되었던 거 같아요. 이번에 시 같은 경우는 세상이 하도 회귀를 하니까 정치라든지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에서 너무 옛날 목소리가 나오니까 저희들 세대만 하더라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목소리 사고 방식이라서 여기에 대해 과거의 우리 선배 선생님들은 어떻게 외쳤고 어떻게 대응을 하셨는지가 궁금해서 옛 시인들의 시를 읽어 봤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부담스러운 목소리를 가졌던 어르신들, 접어 놓았던 시인들을 다시 꺼내서 봤는데, 그때 부담을 느꼈던 건 거기서 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던 게 가장 컸던 거 같아요. 그들이 그 목소리를 내서 일종의 스스로 존재하려고 애썼다는 그 모습이 그때는 단지 하나로 어떤 수양의 관점에서 보였다면, 지금은 내가 하루를 살더라도 내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라는 그 목소리가 되게 실존에 걸린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시가 좀 읽히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전에는 읽지 못했던 시들이 이제는 읽히는 걸 느끼면서 시가 만약 무대에서 발휘된다면 관객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좋은 배우님들하고 같이 시가 공감대를 울릴 수 있으면 어떤 드라마적인 구성이나 잘 만들어진 연극 이런 거 말고 그냥 그 목소리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히 우리에게 동시대적으로 살아 있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극 중에서도 김수영 시인의 시론이 소개되었습니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쓰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연출 선생님께서는 이 몸이란 것이 어떤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고, 오대석 배우님께 그렇다면 연기라는 건 어떤 것이라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재엽 연출

全존재라는 말도 많이 하지만, 존재 그 자체인 거 같아요. 머리나 생각을 하는 것과 느끼는 것 그것 자체를 구별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자체로서 사실은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를 말하는 것 처럼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 시를 쓴다는 것이고 예술 한다는 것도 사실은 예술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 예술이다. 이렇게 받아들여지더라구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런 상황을 겪었다라는 느낌이거든요. 과연 진짜 전존재로 온몸을 받쳐서 작품을 마주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그 말 속에서 반성하게 되더라구요.

오대석 배우

가장 중요한 기본은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기초가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가지고 있는 연기에 대한 생각은, 우선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똑같다라는 건 예를 들어 인간의 성격이 백만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모두가 똑같은 퍼센테이지로 태어나는 거죠. 흔히 우리가 보고 있는 나쁜 성질, 좋은 성질들이 백만 가지라 해도 모두 똑같이 가지고 태어나지만,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서 퍼센테이지가 옮겨지는 거죠. 그후에 사회적으로 해선 안된다는 게 있으면 그 비율을 바꾸게 될 거고, 물론 바꾸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그래서 지금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전제하는 건 어쨌거나 사람은 다 똑같은 거에요. 우리가 길을 가다가, 저는 남자니까, 섹시한 여자를 보고 흥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나서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 걸 한다는 것에서 내 안에 그 성질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거죠. 단, 내가 사회적인 제한에 따라서 그런 걸 감추고 있는 거라는 거죠. 그런 전제하에 제가 생각하는 연기를 하는 방법은 첫번째로 절 믿는 것인데 (예를 들면 살인자 연기를 하려면) 저도 살인자라는 걸 인정해야 해요. 그러면 살인자 역할을 맡을 때 저에게 남아 있는 0.0001 프로 남아 있는 이 살인자의 성질을 배우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프리즘을 통해서 백프로로 만드는 거죠. 백프로로 만들면 제가 무대에서 살인자가 되는 거에요. 그 다음에 공연이 끝난 다음에 분장을 지우면 그 프리즘을 통해서 다시 나로 돌아오게 되는 건데, 제가 후배 배우들이나 선배 배우들에게 자주 하는 얘기는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의 유일한 면죄부의 공간이 종교가 아니고 무대라는 겁니다. 여기서는 역할에 따라 살인을 잔인하게 할수록 박수를 받게 되더라구요. 이 시작점은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는 것인데, 그만큼 사람들을 믿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해요. 그래야 제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키워서 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되게 극단적인 역할을 맡은 경우에 그분들이 그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하고 나서 길을 잃어버려서 잠깐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시잖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중간과정의 프리즘을 좀더 잘 끊임없이 연마하고 있다면 이 (프리즘을) 오고가는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녹취 정리 임승태

2014년 11월 1일 토요일

‘사물의 반란’: 문화역서울284 <최정화-총천연색> 그리고 국립현대무용단 <불쌍>

이흔정의 DRAMATIC.CITY

전시 <최정화-총천연색>

여전히 바쁘고 화려하지만 어딘가 유독 쓸쓸한 서울의 가을, 문화역서울284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꼭 닮은 전시가 열렸다. 최정화 작가의 <총천연색(總天然色)>이다. 그는 누군가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고 ‘시선’을 주지 않으면 지나치거나 버려질 것들로 꽃을 피워냈다. 편하게 말하자면 ‘잡동사니’들로 말이다. 그래서 처음 전시를 보면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든다. 너무 흔한 플라스틱 접시, 빗자루, 장난감 왕관 같은 사물들이 정갈하게 배치되어, 그럴싸한 작품명으로 조명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어쩌면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기 보다는, 작가처럼 세상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열심히 보태어 감상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았다. 애초에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물건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건을 만든 사람, 사는 사람, 선물하는 사람, 버리는 사람, 그걸 다시 주워오는 작가까지 각자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동원 해본다. 그러자면 많은 사람과 삶과 이야기가 끌려 들어온다. 어렴풋이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간의 무수한 관계와 삶의 역동이 느껴진다. 이렇게 ‘별게 아닌 것’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관객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꽃의 만다라>
 이렇게 일상적인 사물들 혹은 재활용품을 이용한 작품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면, 미술관이라는 제도 혹은 상징적인 공간에서 유명한 작가가 한 것이라면 뭐든 예술이 되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되물어보자. ‘예술이 별거 아니다’라는 낮은 시선을 취한 유명한 작가의 작업이 우리의 잡다하고 조악한 일상을 다시금 소중하게 바라보게 하지는 않을까. 사실 전시된 물건 중에는 딱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다소 흉측한 것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형광색과 원색의 물건들을 계속 보고 있자면 아름답기보다는 현기증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또 우리의 모습과 닮은 것 같다. 실수와 허점투성이인 스스로가 때로는 미워지고 쳐다보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과 우리 일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따뜻하게 봐주면 어떨까. 미움과 분노, 자책과 실망이 무엇보다 쉬운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꽃 입니다’라는 작가의 말은 사실 큰 용기가 필요한 외침이니까 말이다.




국립현대무용단 <불쌍>

전시를 보고난 며칠 뒤, 최정화 작가의 설치 작품을 전시장이 아닌 ‘무대’ 위에서 만났다. 국립현대무용단과 최정화 작가가 ‘콜라보레이션’을 한 것이다. 이 둘의 만남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냈을까? 전시장에 있을 때와 무대에 있을 때 그 작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재치 있는 공연 제목 <불쌍>은 종교적 상징물인 ‘불상’이 여러 세대와 문화권을 이동하며 일상 속에서 고유의 신성함을 잃고 변형되어 속되게 사용되는 ‘불쌍’한 처지에 놓였음을 말하는 언어유희이다. 이 공연이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불상의 변형은 여타 문화, 전통, 종교, 인물 등의 ‘세속적인 상품화 및 변형’을 함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공연에서조차 불상은 불쌍하게 또 하나의 ‘기호’이자 ‘은유’가 된 것이다.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프랑스 파리의 ‘부다 바(Buddha Bar)’
<사진출처: Buddha Bar 홈페이지>

<불쌍>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유쾌했던 부분은 공연 초반부에 만들어진 ‘콜라주’였다. 무용수들은 동서양을 막론한 온갖 종류의 문화 아이콘을 무대에 끌고 나오고, 그것들을 무용수의 ‘움직임’을 통해서 콜라주한다. 슈렉, 아톰, 심슨 등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예수상, 불상 등의 종교적 상징물들과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싸우고, 키스한다. 불상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무대 위에서 하나의 ‘소도구’ 혹은 ‘장난감’이 된 것이다. 머리에 이고, 팔에 끼고, 손을 쓰다듬어 보고, 무릎을 베고 눕고. 무용수들의 손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불상과 예수상 등의 종교적 상징물들은 종교적 의미, 신성함, 아우라 같은 것은 모두 잃었고, 말 그대로 ‘가벼워’ 졌다. 무대에서는 조명이라도 받고 있지만 이 무용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저 불상들은 얼마나 굴러 다니고, 온갖 방식으로 수모(?)를 겪었을까?

동서양의 상징물을 콜라주하는 것은 시각미술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무대 위에서 무용수의 몸동작으로 콜라주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만들어냈다. 전시장이나 일상에 놓여있을 때와 달리, 무대 위에서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 움직임, 리듬, 속도감이 더해짐으로써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이미지가 오브제에 덧입혀지고, 역으로 오브제의 성격과 영향에 따라 사람의 움직임이 만들어지는 상호작용이 생겨났다. 사물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몸’과 ‘오브제’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더해질수록 불상들은 더 초라해졌다. 움직이는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고정된 조형물의 대비 때문이기도 하고, 무용수들이 조각에 신체를 겹쳐서 발을 빨리 움직인다든지 하는 동작을 함으로써 우스꽝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서로 전혀 연관성 없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 사이에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관계들이 생겨나고, 달라지고, 없어졌다. 예를 들면 캐릭터 가면을 쓴 무용수들의 몸이 엉키고 경합을 벌이면서 서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지거나 서로의 몸에 매달림으로써 위아래가 뒤집어지기도 했다. 이를통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를 만드는 지속적이고 단일한 관계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고 서로 교환되는 유동적인 관계가 만들어졌다.


무대에 특정한 소도구나 오브제를 등장시킨다면, 여기에도 ‘무용수’나 기타 요소들 못지않은 그 오브제만의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불쌍>에서 등장하는 최정화 작가의 설치물들은 어떤 목소리를 냈을까. 최정화 작가는 이번 전시 기간에 서울역 앞의 노숙자들과 함께 소쿠리를 이용하여 빛을 조절할 수 있는 거대한 등을 설치했는데, 그 형형색색의 소쿠리는 무대라는 공간에서 또 다른 성격을 보여주었다. 무용수들은 소쿠리를 ‘던지고, 몸에 쌓고, 징검다리처럼 밟고 지나가기, 무대에 쌓았다가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등’ 하나의 오브제를 한 가지 방식으로 활용하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로써 오브제의 성격이 풍부해졌고 동시에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리듬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도 그 자체로 화려한 오브제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사진제공: 국립현대무용단

스티로폼 도시락을 연결해 만든 무대 배경도, (콜라보레이션을 위해서 억지로 무대에 맞지 않는 오브제를 우겨 넣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들의 등퇴장로를 만들어주는 동시에 공연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조명이나 프로젝션된 영상 없이는 드러나지 않지만, 스티로폼 도시락들의 높이가 서로 다르게 설치되어 영상이 투사되었을 때 입체감을 만들어내었고, DJ의 음악이 어우러져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상의 사용을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들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오브제만큼이나 무술, 브레이크 댄스 등 여러 가지 다른 움직임들이 안무에 활용되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의 공연으로 직조되기보다는 나열만 되는 듯한 인상이었다. 재치 있는 제목과 ‘하이브리드 놀이판’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으나 잘 놀았다기 보다는 경직된 느낌이었다. 라이브 디제잉이 무대 한 구석에 있으면서 디제잉 다운 면모를 살리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국립무용단이지만 조금 더 젊은 무용수들이 무대 위에서 마음껏 놀 수 있게, 그래서 관객도, 비록 앉아있지만, 신나게 놀 수 있게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은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느라 오히려 서로 독이 되어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잦은데, 그래도 <불쌍>은 무용과 시각미술, 음악, 의상 등의 콜라보레이션이 서로를 보완하며 따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새로움’을 만들어 냈다. 더욱 과감한 시도를 기대한다.

공연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swQo6TQFj28

*이 글은 문화역서울284 모니터링에 게시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2014년 10월 13일 월요일

뜨거움의 ‘형식’, 혹은 형식의 ‘뜨거움’에 대해서 : 오태석 작, 김현탁 각색/연출 <자전거>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어떤 정의할 수 없는 경계에 서서 작품을 바라본다는 건.
작품의 안과 밖에서, 
믿고 싶었던 소망과 와 닿지 않는 허망 사이에서,
뜨거운 열렬함과 물적인 에너지 사이에서.

창작과 감상, 
감상과 비평, 
그 사이 사이에는 모호한 틈새가 있어서 작품을 보고나서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야. 라고 생각하다가...   

  누군가의 작품을 내적으로 응원하고 소망하는 입장에서, 외적으로 기대하고 관찰하는 입장으로 굴절되는 지점에는 과연 어떠한 전승과 어떠한 변수가 있는 걸까. 김현탁 연출의 작품은 내게 여전히 정의 내려지지 않는 어떤 경계 선상에 서 있다. 분명히 절실하고 번뜩이는 대화로, 아니 대화 이상의 교감으로 어떤 언덕의 지점들을 함께 바라보았던 순간들을 여전히 믿고 있는데... 관객으로 돌아 간 나는 그의 작품 안에서 분명히 어딘가에서는 잠재하고 있을 어떤 열기의 흔적들을 찾으며 작품에 집중하는데... 분명 무대 위에서는 형식을 넘어서는 에너지의 열기가 구현되고 있는데... 무대 위의 후끈한 기온이 피부에 와 닿아 스미기도 하는데... 그런데도 그 열기와 에너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이유는 무얼까. 그 열기와 에너지에 대한 나의 질문은 다시 말해 이런 종류의 것이다. 이토록 무대 위에서 ‘진실로’ 에너지를 구현하고 있음에도, 심지어 무대 위의 열기가 객석 너머로 불어오고 있음에도, 그 에너지가 관객에게 ‘물적’인 에너지로 ‘보여지는’ (‘체험되는’이 아니라) 이유는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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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의 양 옆선에 자전거 대열이 배치되어 있고, 이 자전거들은 불특정 관객들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돌려진다.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무성의하게 자전거가 돌려졌을 때에는 이 공연이 멈추게 된다.라는 경고성 메시지와 함께) 관객의 ‘비’자발적인 참여로 인해 둘러싸여진 이 무대는 시작부터 어떤 출구 없는 테두리 안에 갇혀지는 느낌이다. 어떠한 에너지의 강요. 그것의 시작. 그리고 무대의 앞 선에는 무엇이든 극도로 직시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듯한 과장된 광원이 배치되고, 무대의 뒷 선에는 이 광원에 의해 투사된 배우들의 그림자가 매 장면마다 흐릿하게 확장된 채 어른거린다. 이렇게 사방이 과장되고 강요된 에너지의 edge로 둘러싸여진 그 한가운데에 무대가 있다. 출구 없이 증폭된 에너지가 조장되는 그 한 가운데에.
  배우들이 등장하고, 이따금 그들은 오태석 원작의 <자전거>의 대사들을 읊는다. 장면의 구성은 <메데아 온 미디어>와 <열녀춘향>에서 시도된 바 있었던 다양한 채널들의 연출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만의 특이점이 있다면 다양한 채널들 속에 공통적인 시선이 있다. 이를테면 각종 담화의 ‘주변’ 담화들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가 모두 끝난 이후에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선언문, 수술대 위에 환자를 올려놓고 주고받는 뒷이야기, 지하철에서 구걸을 호소하는 걸인에서부터 선거장에서 표를 호소하는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의 진실이 아닌, 그것들을 에워싸고 둘러싼 주변의 담화와 액션들, 어떠한 핵심의 ‘나머지’ 상황에 집중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도 실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것들에 저마다 집착의 지점들을 붙들고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려 하는 듯이.

  이 연극의 매 장면들은 형식을 위한 ‘의도적인’ 형식으로 보여진다. 구태여 형식들에 또 다시 형식들을 덧대고 있는 느낌. 그가 마지막 장면에 배치한 세월호 사건의 ‘주변’을 둘러싼, ‘나머지’ 상황들이 얼마나 형식적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연극 안에서 말하고자 함이었을까? 모든 장면들이 어떠한 전시를 위한 형식들로 다가왔다. 여기에서 잠깐, 주의를 당부하고 싶은 것은 ‘형식’이라는 단어에 대한 편견이다. 김현탁의 형식을 놓고 말들이 많다. 그의 연극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진정성이 있는 형식을 구현하느냐 라고. 형식이냐, 진정성이냐의 문제가 마치 이분법적인 구분선을 지닌 답인 것처럼. 그러나 그 어떠한 작품인들 형식과 진정성 사이에서 자기만의 명확한 좌표를 표명할 수 있을까? 작가는 형식과 진정성 내지 철학,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시선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 시선이 어떠한 지점에서든 정당성을 가질 때 비로소 작품과 관객이 교감할 수 있게 된다. 김현탁을 옹호하든, 거부하든, 그 이유가 단지 그가 지닌 ‘새로운 형식’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단지 ‘새로움’을 옹호하거나 거부하기 위함이 비평의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오늘 새로운 것을 보았노라” 라며 작품을 칭찬하거나 폄하하는 정도의 감상이 비평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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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형식‘성’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보겠다. (보다 편견을 벗은 단어로서의 형식’성‘에 대해서) 형식 그 자체를 표면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형식성 그 자체에 대해서. 형식 자체를 신봉하는 형식성의 절실함에 대해서. 무대의 시작 형식이 그러했고, 그리하여 매 장면들 마다 매번 무대는 배우들의 땀으로 움씬 적셔졌다. 그런데 이 배우들의 그 절실한 땀과 기운은 관객에게 촉각적인 감화로 전해지기보다는, 시각적인 imagery로 물화되어 저 무대 위에 고여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품의 형식‘성’에 주목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이런 느낌. 마주 보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친구가 슬픔 혹은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데, 미안하게도 나는 저 친구의 슬픔 혹은 분노를 코앞에 놓고도 바라보고만 있다. 미안하게도 힘들겠다 라는 가식적인 말조차도 안 나온다. 심지어는 네가 몸을 떨고 있는 그 슬픔 혹은 분노가 어리석고 한심하게 ‘보인다’. (‘느껴진다.’가 아니라) 그것은 가만 생각해 보면, 그의 슬픔 혹은 분노의 ‘내용’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소유이고 개인의 몫인 모든 감정 가운데, 옳은 것이 어디 있고 틀린 것이 어디 있으랴. 문제는 그 친구가 울어대는 ‘방식’에 있다. 너는 내가 울 테니 한 번 꼼짝 말고 거기 앉아서 나를 봐, 너는 내가 화를 낼 테니 한 번 거기 앉아서 그냥 나를 봐. 라는 식의 태도 때문이다. 아무리 아끼는 친구라도 그런 태도로 내 앞에서 술잔을 들이킨다면 싸대기를 한 대 날려줄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 꼴이 보기 싫어 그 친구가 울어대는 내용에까지 시비를 걸고 싶어질 것이다. 만일 그 친구가 힘들어하는 대상이 헤어진 남자친구라면, 이렇게 시비를 걸 것이다. “네가 그 딴 식으로 울어대니까, 그런 놈이나 만나지.” 혹은 “진짜 사랑이나 했냐?”라고.

  다시 형식과 내용의 문제다. 어느 작품에서나 형식과 내용은 그 작품만의 시선과 질서 안에서 어느 정당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정당한 지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관객과 함께 호흡되어야 한다. 그 정당한 지점은 마치 선원근법화의 소실점과 같아서 분명히 존재하나,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다. 피카소가 말했듯 ‘내용과 형식, 그 가운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한 데 섞이는 지점’이다.
  따라서 형식과 내용의 문제에 대해서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창작 혹은 비평에 반대한다. 즉, 단지 언어를 해체하고 드라마를 해체하고 장면을 해체하면 실험(형식)‘적’ 연극이요, 휴머니즘을 이야기하고 정치 사회 이슈를 거들먹거리면 주제(내용)‘적’ 연극이라고 이분화하는 시선을 전제로 깔고, 어떤 작품의 기여도를 위계화하는 것에 반대한다. 어느 작품에서나 형식과 내용은 뜨거운 소실점을 향해 함께 달려가는 상보적 경쟁자이다. 중요한 것은 작품마다 그 뜨거운 소실점이 어디에 위치하며, 그 소실점을 향해 형식과 내용이 어떠한 각도의 선을 긋고 있는가이다. 그리고 정작, 그 소실점이 관객에게 어떻게 반향되는가이다. 다시 말해 형식과 내용 가운데 무엇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이 만나는 그 뜨거운 지점을 망각하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뜨거운 지점의 불가항력적인 힘 안에서, 관객을 포섭해달라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연극의 형식과 내용의 상관관계를 읽어낸다면, 이 작품은 형식 안에 내용을 달구어내려고 한 연극이다. 전작들에 비해 형식에 더욱 형식들이 ‘덧’대어졌다. 그리하여 형식의 구조가 더욱 고도화되었다. 그것은 형식이 보다 집중적으로 탐구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형식의 뜨거움으로 결국 내용을 형식화하려고 했다. 형식 안에 내용이 환원되어 있다. (형식 안에 내용이 ‘치환’되었다는 말로 오해하지 말기를) 심지어는 마지막 장면에 구명조끼를 입은 여학생이 절규를 하고,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BGM으로 깔고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나와 기계춤을 추며 커튼콜을 하는 장면에서는 분명 두 가지의 축이 충돌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텐데. (고도로 형식화된 시선으로 내용을 전시하는 태도와 그 태도 안에 서려 있는 내용에 대한 풍자가) 그것이 ‘지나친’ 가학성으로 다가왔다. 과연 이토록 아프고 현재적인 정서까지도 형식‘화’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라고. 아픔을 전시하는 이러한 가학성은 지나친 것 아닌가? 여기에서 ‘지나친’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과연 이 작품에는 어떠한 뜨거운 소실점의 좌표가 있었을까?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하도 고함을 쳐 대니까 정작 고함치는 이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연극이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일행과 대학로에서 가장 지저분한 술집을 찾아 가 막걸리나 마시자, 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는 동시에 어떤 ‘숨김없는’ 것들이 갑작스럽게 그리워졌나보다. 형식과 내용을 불문하고 <메데아 온 미디어>나 <열녀 춘향>에 서려 있던 어떤 즐거움이 사라졌다. <혈맥>과 <세일즈맨의 죽음> 안에 갇혀 있던 에너지가 더욱 갇혀진 상태로 고도화되었다. 그 어떤 전작들보다도 냉소적이고 악다구니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뜨겁고 치열해지기도 했다. 혹자는 진심으로 이 공연을 보고 퉁퉁 부을 만큼 울면서 나왔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이 연극의 모든 표현이 열렬한 뜨거움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여 이 작품이 보다 현실에 가까워졌노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어지러워졌다. 다시 한 번 비평의 ‘불’가능함을 절감하면서. 모든 작품은 개개인의 가치관과 꿈과 욕망과 맞닿아 있는 문제이므로, 우리는 비평 이상의 감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단, 비평과 감상이 어떤 구분법에 의존하는 것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형식 혹은 내용으로 구분된 원리랄지, 새로움이라는 단순한 지표에 의한 원리만은 아니기를. 김현탁 연출이 빚어내는 현상을 필두로 극단적 욕망들이 교차하는 감상의 형식들이 흥미롭다.

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황금 연못>과 사랑의 올바름

에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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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재현이 대학로에 세운 새 극장에서 <황금연못>이란 미국 드라마를 하고 있다. 이순재와 신구라는 걸출한 시트콤 스타 원로 배우가 더블 캐스트로 주인공 역할을 맡고, 여기에 그들의 부인 역으로 맞춤한 나문희가 출연한다. 덕분에 평소 대학로 극장에서는 보기 드문  중년 부부나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TV는 연극 무대에서 관객과 배우를 빼앗아 가기도 하지만 다시 데려오는 요물임에 분명하다.

스키장 리조트를 운영하는 기업의 극장이라 그런지 객석은 초보용 슬로프처럼 길고 완만하게 펼쳐져 같은 규모의 극장보다 많은 관객을 받을 수 있는 반면, 무대 폭은 좁아 무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이 자못 가파르게 펼쳐진다. 그곳을 자주 왕래해야 하는 노만 역의 신구 선생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도 인체공학적인 계단이 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 응접실 연극의 환경을 갖추고 있는 무대에 또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뒷무대 전체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연못'의 이미지이다. 제목에서 즉각적으로 환기되는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 이미지가, 그리고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과연 연못이라 할 수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전에 따르면 연못이란 "연꽃을 심은 못"이고, 다시 못이란 "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 있는 곳", 간단히 말해 작은 물 웅덩이를 일컫는다. 못이란 늪보다 작고, 늪은 다시 호수보다 작은 규모의 웅덩이를 지칭한다는 국어사전의 기준을 한편에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pond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본다. Webster 사전에 따르면 pond란 보통 lake보다 "작은" 물 웅덩이를 일컫는 것이다. 실제로 극에서는 집배원 찰리가 보트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고, 첼시는 거기서 수영을 하고 있으며, 노만과 빌리는 릴 낚시를 하고 있다. 무대 배경 그림 역시 이러한 활동이 가능한 정도의, 그래서 우리가 보기엔 분명 호수로 보이는 것이 그려져 있다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확성을 기하고자 "황금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작 제목의 전치사까지 살리지 않는 이상 황금못은 같은 색상의 망치가 먼저 떠오르고 말 것이다. 번역의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을 옮기는 것도 이렇게 복잡한 일이라면,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연극이 한국 배우에 의해 한국어로 공연되는 순간 상당히 다른 의미로 전달되고 변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예를 들어, 극중에서 노만은 펜실베니아 대학 영문과 명예교수로 소개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 관객에게는 그 대학의 학풍은 커녕 그곳이 좋은 곳인지 아닌지도 전달되지 못한다. 또한 노만이 비록 자신에게 곧 다가올 죽음을 의식하면서 냉소적인 말들을 내뱉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부인의 아름다움에 반해있는, 꽤나 전형적인 가정적인 미국남자임을 머리로 알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신구를 통해 (그리고 아마도 이순재를 통해) 내 눈 앞에 나타나는 노만이 자꾸만 한국의 아버지상과 겹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이 문제는 이 극의 중심 갈등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다. 노만은 자기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며 그 사랑을 표현하지만, 선택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또 다른 여자인 자신의 딸과는 잘 지내지 못한다. 첼시는 마흔이 넘도록 유년 시절에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은 아버지에게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노만 역시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네 상황에서는 딸바보란 말이 유행하듯 부인에게는 인색해도 딸에게는 너그러운 아버지들이 더 많다는 점에서 이런 상황이 낯설 수도 있다. (물론 대학교수는, 게다가 명문대 교수는, 누구든 잘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을 덧붙이면 충분히 납득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기 까지가 어려울 뿐 갈등은 별로 특별한 계기 없이 해결된다. 미국의 한 리뷰에서 이 극을 "소박하고 아름답다"고 했다면 바로 이 심심한 갈등 해결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짧은 극은 사랑이란 주제를 다층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보다 문제적인 작품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이 극에는 부부 간의 사랑이라는 적법하고 '정상적인' 사랑이 중심에 놓여 있으나, 그 주변으로는 실패한 사랑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랑도 함께 배치되어 있다. 에셀을 통해, 사실은 찰리의 전언을 다시 한번 중계하는 형태이긴 하지만, 언급되는 레즈비언 커플은 정도에 있어서는 노만과 에셀에 뒤지지 않고 시간에 있어서는 더 오랫동안 사랑하고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이라 그들의 삶도 사랑도 이 황금못가에 숨기고 있어야 했다.

찰리와 첼시의 관계는 그저 찰리가 첼시에게 몇 차례 추파를 던지고 첼시가 거절하는 것 이상의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공연에선 생략된 것으로 기억되지만) 찰리와 첼시는 어릴 적 서로에게 관심과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이였으나, 명문대 교수 아버지에겐 시골 마을에서 신문이나 배달하는 집배원이 결코 자기 딸의 짝으로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에셀이 찰리의 (이상한) 웃음까지도 사랑스럽게 보고 그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이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 어머니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서양 드라마 전통에서 전령messenger이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줄 뿐 극의 중심에 놓여질 수 없는 운명이니(실제로는 그래선 안되겠지만) 찰리의 실연은 드라마적으론 대단히 정당한 일이다. 자꾸만 실없이 내뱉는 그의 웃음은 결코 웃을 수 없는 그의 심적 상태를 반어적으로 표현하는데, 다만 이번 공연에서는 그에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출연 분량을 보충하기 위한 제스쳐로 느껴지기도 한다.

비록 영화 버전에 대한 리뷰이긴 하지만 로저 에버트가 이 극에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은 부분은 첼시의 남자 친구 빌 레이가 노만과 둘이서 나눈 대화이다. 여기서 빌은 노만에게 그의 딸과 같은 방에서 자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데, 여기서 빌이 구하는 것은 사랑의 적법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이 이상한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이후로 드러나듯이 두 사람의 사랑은 일반적이지도 적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유럽 여행 중 브뤼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온 다음 빌은 그제서야 자기 아들의 엄마, 그러니까 전 부인과 관계를 정리하러 떠난다. 막장 드라마로 발전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이 상황은 노만이 그 둘을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줌으로써 별일 아닌 것으로 정리된다. 노만이 자기 커플도 처음부터 적법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 결코 가볍지는 않다. 하지만 이 문제가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어물쩍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관객들의 비난을 면하긴 어려웠을 테지만, 이 극이 노년 커플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 이상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입센 이후로 사실주의극은 언제나 관객을 불편하게 (해야) 한다. ㉦

로저 에버트의 영화 리뷰 링크
http://www.rogerebert.com/reviews/on-golden-pond-1981

한편, 진선미 의원이 동거를 법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http://omn.kr/ahcw

postscript

이 글을 공개하고 난 뒤 뭔가 석연치 않아서 급기야 구글 맵에서 메인 주에 있다는 Golden Pond를 찾아보았다. 실제로 이 이름의 못은 검색되지 않지만, 이 지역은 크고 작은 pond와 lake가 아주 많이 있다. 아마도 석양에 황금빛이 된다고 해서 Golden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이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노만과 에셀 부부에게 매우 적합한 장소임도 밝혀진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물 웅덩이의 이름들이다. 그곳에는 백두산 천지호 만한 크기에 버젓이 "pond"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물론 그것도 오대호에 비하면 연꽃이나 심을 작디작은 못에 불과하다.


2014년 9월 26일 금요일

2014년도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만난 공연들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저도 한 번 써 봤습니다. ‘연극人’을 따라해 본 꽃점평 (그러나 꽃점은 없습니다. 그리고 쓰다 보니 다소 길기도 합니다.)

# 두산 아트랩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 윤성호 작, 전진모 연출, 두산 스페이스111, 8/28~8/30 

(+) 낭독이 이야기로, 이야기가 이미지로, 이미지가 순간으로 전환되는 지점들. 찰나의 순간을 넘어서자, 작품 속 망연한 표현들이 희미한 연기를 뚫고 비로소 아름다운 풍경으로 펼쳐진다.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무대 위의 이미지적인 몸체가 ‘분명히’ 맞닿는 순간들을 보았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 그 희미한 공기 속에 비계처럼 끼어있는 소통 불가능한 언어의 엇갈림. 다루고 있는 내용은 막연하나, 그것을 표현해내는 이미지들은 정확하다.  

# <아버지를 찾아서>, 이승헌 연출, 옴브레 음악 감독, 게릴라극장, 8/28~9/7 

(+) 인간에게서 상식이라는 장치가 사라졌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흔쾌히’보여주는 태도가 박력 있다.
(+) 땀으로 젖은 두 배우의 몸, 그 촉각적 기억. 그리고 어느 순간에 컷을 잘라도 인상적인 스틸 이미지가 나올 법한 두 배우의 끊임없는 살아있음.

# <래빗홀>, 데이빗 린제이 작, 김제훈 연출,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8/21~9/6 

(+) 연극과는 가장 상관이 없는 먼 타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연극의 첫 장면을 시작했던 방법. ‘그’ 사건의 가장 먼 데에서부터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방법. 가장 평범해 보이는 듯한 순간에서부터 매 장면을 시작했던 방법. 바로 이 방법들에 작품의 시선이 스며있다. 마치 ‘그’ 사건이 타인의 것이었기를 바라는 이들의 시선. 고통을 일인칭화하는 것의 지독한 어려움.
그래서 결국 장면들의 말미에는 ‘그’ 고통이 피할 곳을 찾다가 나의 고통으로 안착되는 순간들이 있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이 가만히 병들고, 우묵한 슬픔을 응시하는 모습들.
신의 세계에서마저 위안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온전히 또 다른 우주를 꿈꾸지만... 그래서 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눈에만 보이는 ‘래빗홀(토끼굴)’이지만... 그러나 이 작품 속에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래빗홀에 빗대어지는 어떤 보이지 않는 통로이기보다, 강애심 배우가 힘겹게 읊는 한 장면 속에 녹아 있다. 지독한 고통을 주머니 속의 벽돌처럼 지니고 살아 온 그 세월의 어려움을, 지극히 어렵게 쓰다듬으며 “...좋아” 라고 내뱉는 그 한 마디의 대사 속에. 지극한 고통을 쓰다듬어 온 세월의 지극한 무게,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믿는 태도의 힘.  
(-) 오로지 대본의 훌륭함에 의존하고 만 연극.    

# <남산에서 길을 잃다>, 백하룡 작, 김한내 연출, 국립극단 소극장 판, 9/16~9/28 

( ) 삼국유사프로젝트라는 기획의 타이틀과 이 공연의 사이, 혹은 삼국유사라는 기획의 소재와 이 공연의 근저에 놓인 진심의 사이, 보여주고자 하는 순간과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사이, 그 사이가 너무 멀다.

# <반신>, 하기오 모토 만화 원작, 노다 히데키 작/연출, 명동예술극장, 9/20~10/5
(+) 뇌리에 부딪칠만한 대사의 율동감. 그것이 배우들 몸의 율동감으로, 무대의 미술적 율동감으로 이어지면서 연극의 세계가 마치 마리아와 슈라의 움직임처럼 한 데 손을 맞잡고 돈다. 두 개의 나선이 소용돌이치며 서로를 감싸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빗겨간다. 늘 붙어있으면서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미지의 아연한 리듬감
(+) 이렇게 전반적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끊임없이 지속되는 코믹한 공기의 탁월함
(+) 슈라 : “고독이라는 거 말이야, 사실은 좋은 거지? 그렇지?”
(-) 마리아와 슈라를 잇는 의상이 보다 탄력적이고, 상상력을 만발케 하는 소재였더라면...
(-) 연극이 슈라를 상실한 이후, 무대에 보다 적막감이 흘렀더라면... 슈라의 상실을 보다 상실‘감’으로 채워 넣었더라면... 후반부에 개입된 환타지는 지나친 감이 있다.

#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 이경성 연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9/13~9/21 

( ) 작품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을 둘러싼 곳에는 분명히 진심과 따뜻함이 느껴지는데, 그 시선이 작품에 착지하는 속도가 자꾸만 더딘 느낌
( ) 자꾸만 ‘자연스러움’을 읽으려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것이 의심된다.
( ) 애순씨가 등장하는 순간의 앞뒤가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났으면...

# <먼 데서 오는 여자>, 배삼식 작, 김동현 연출, 게릴라극장, 9/12~9/28 

(+)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이야기라기보다는. 망각을 둘러싼 기억과 기억을 둘러싼 망각, 그것의 사이를 다루는 이야기
(+) 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보듬어내는 말들의 부피, 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기억으로 더듬어내는 아픔의 깊이, 대본에서 우러나오는 연극성, 연극성을 초월하는 대본의 힘
(+) 11년 전의 과거로 굳이 거슬러 올라가서 지금의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함 속에 숨겨진 것의 의미

2014년 9월 6일 토요일

9월의 장바구니

산책

독자 여러분 안녕하셨나요? 모니터를 앞에 두고 인사를 건네자니, 무척 쑥스럽습니다. 그러나 7월, 8월 연재를 쉬었기 때문에 혹,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궁금증을 가진 분들이 있을지 몰라(정말 아름다운 상상이군요) 인사로 시작합니다. 답답한 세상 일들은 여전하지만,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바람이 솔솔 불고 하늘이 높아지니 조금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지친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공연을 검색하고 예매를 시작했습니다.

<즐거운 복희>, 8월 26일 ~ 9월 21일, 남산 예술 센터 



어떤 사람을 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복희에게 슬픔이 강요됩니다. 줄거리를 살짝 살펴보니, 그녀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돈”입니다. 제목처럼 복희는 슬픔을 벗어내고 즐거움을 느끼며 홀로 설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호숫가 펜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밝힐 때, 혹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드러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탐닉하고, 소비합니다. 교통사고도, 화재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호 사건도 이야기가 자꾸만 덧입혀집니다. 사람들은 인물과 성격을 창조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가운데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강요되고, 누군가에게는 우울감, 또는 넘치는 희망이 강요됩니다. 보고 나와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남산 예술 센터의 원형 무대에 구현될 호수, 복희 이야기를 넘어서서 작가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 이런 것들을 기대하고 극장에 갑니다.

<위키드>, ~ 10월 5일, 샤롯데씨어터 

 

영국 여행에서 뮤지컬 관람을 빠뜨릴 수 없지요. 가난한 여행자였지만 당일 할인 찬스를 이용해서 <위키드>를 보았습니다. 극장 내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게 해주는 것에 즐거워하고, 작품에 감동해서 숙소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위키드>가 한국에 많이 알려진 작품이 아니라 함께 여행 중이던 친구는 다른 작품을 보러 갔었는데, 다음 날 친구를 데리고 가서 한 번 더 <위키드>를 보고 왔습니다. 어찌나 뿌듯하던지요! 한참 동안 뮤지컬 넘버도 열심히 들었습니다. 아시아 팀이 대한했을 때 한 번 더 작품을 보았는데, 그때는 처음과 같은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국인 캐스팅으로 진행될 때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작년에 시작된 작품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꽤 놀라운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작품을 찾아주나 봅니다. 추석 연휴에 제공되는 할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매했습니다. 한국어로 부르는 노래들이 어떨지(번역은 어떨지), 한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등장 인물은 원작과 어떻게 같고 다를지 궁금합니다.

<노란 벽지> 9월 25일 ~ 9월 27일,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서울 국제 공연예술제(SPAF)가 9월 25일 시작됩니다. 총 21편의 작품이 공연되는데, 다양한 해외 초청 작품 뿐 아니라 극단 목화와 연희단거리패의 작품 등 국내 초청 작품들도 기대해 볼 만 합니다. 각 작품의 공연 기간이 매우 짧고 이미 조기 예매 등이 진행된 터라 티켓을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심 있는 작품에 좌석이 남아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예매하세요! <노란 벽지>는 SPAF의 첫 작품으로, 동시대 최고 연출가로 평가되는 독일의 케이티 미첼의 연출작입니다. 벽지 속에 어떤 존재가 갇혀 있다고 믿는 주인공은 어떻게 될까요?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조인성 분)같군요!)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방식이 그녀의 이야기와 감정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리라 기대합니다. ㉦

2014년 9월 5일 금요일

인터렉티브와 미래의 연극

2014 두산아트랩 리뷰 8
에스티

약 한 세기전 전기 조명이 처음 등장했을 무렵, 아돌프 아피아는 장차 조명이 연극 무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지 내다보았다: "라이트는 거의 기적적인 유연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밝기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으며, 팔레트처럼 색깔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그것은 음영을 창조할 수도 있고, 음악이 그러는 것처럼 공간에 진동의 조화를 퍼뜨릴 수 있다. 우리는 조명에서 공간의 표현력 전부를 추출할 수 있다. 물론 그때 공간은 연기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1954, 파비스 <연극학 사전>에서 재인용). 다른 곳에서도 아피아는 조명의 "무한히 크고 다양한 효과"를 강조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전기 조명은 그야말로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피아는 무대의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 통일성"을 갖춘 미래의 연극을 구상했고, 크레이그 역시 무대 위에서의 이미지, 동작, 리듬 등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이 연출가에 의해 총체성을 획득한 새로운 예술을 기대했다. 그들의 시대에 그것은 기대에 불과했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이 꿈꾼 미래가 우리에게는 이미 현실로 자리하고 있다.

카입/황정은/이경화가 함께 만든 "타토와 토"를 보면서 우리 역시 아피아나 크레이그처럼 미래의 연극을 꿈꾸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물론 이번 공연 제목 앞에 "다원"이란 레테르가 붙어야 한다는 건 아직 아피아/크레이그의 미래 조차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무대 예술이 다원적 요소들의 종합 혹은 총합으로 이루어지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다원연극"이란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다원이란 접두어는 여전히 연극이 텍스트와 배우의 연기 중심의 예술임을 방증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대에서 시도되는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는 미래 연극에서 시각적 요소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될지 내다보게 해주는 기회로는 충분하다. 공연 중간에 하드 웨어 문제로 잠시 중단 되었던 것도 불편하기 보다는 그러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말끔한 미래를 꿈꾸게 해준다는 점에서 공연의 일부같이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주 같은 공간에서 터져버린 조명기는 상당히 시대착오적이다.

우리가 좀더 나이가 든 미래에 보게 될 연극에서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영화관에서 보고 있는 현란한 CGI(computer-generated imagery)가 사용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측면에서 영화의 제작 환경이 연극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느낌이다. 장면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방식과는 별개로 배우가 실제로 연기하는 환경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스틸컷으로 보게되는 영화 제작 현장은 우리가 스크린에서 최종적으로 보게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배경은 온통 초록색 스크린 (크리스토퍼 리브가 수퍼맨이던 시절만 해도 파란색이었는데, 헐크가 만들어지는 지금은 초록색이다) 으로 뒤덮여 있고, 배우들은 텅 빈 공간에서 앞으로 후반작업에서 채워질 그 영상들을 상상하며 연기를 펼친다. 이순신 장군에게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었다고 하나, 명량은 단 세 척의 배만 제작한 다음 복사하기와 붙여넣기--훨씬 더 복잡한 실제 작업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로 채워넣었다고 한다. 10여년 전에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 빌>이 나왔을 때, 연극 공부를 갓 시작한 나로서는 그 영화가 무척 흥미로웠다. 영화가 마땅히 보여줘야 할 사실적 일루젼을 취하지 않고 믿기로 하기 make-believe 의 방식으로 그냥 거기 집이 있는 걸로 한다, 또는 무시무시한 셰퍼트가 짖고 있는 걸로 한다는 식으로 장면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년 뒤 우리가 보는 많은 영화들이 그런 식으로 촬영된 다음 후반 작업이란 걸 하면서 일루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실같은 CGI를 보는 것도 분명 재미있는 일이지만, 나는 그 장면이 촬영되던 순간의 연극적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바로 그 촬영장의 상황이 그대로 무대로 옮겨져 와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무대 위에 그린스크린을 설치해 두고 배우들이 연기를 펼친다. 관객들은 아무 것도 없이 연기하는 배우들을 온전히 즐긴다. 그런 다음 집에 돌아가, 혹은 돌아가는 길에 유튜브로 CGI가 채워진 버전을 다시 보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난 지금 2100년대를 얘기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20세기 초기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시도된 키노드라마가 기술의 발달로 요즘 재활성화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만큼 무대연극과 영상의 접목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서도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도전 과제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인터렉티브 연극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좀더 잘 알려진 텍스트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텍스트가 낯설 수록 관객은 텍스트에 주의하게 되고 결국 텍스트가 주도하는 연극이 될 수밖에 없다. 제작하는 입장에서야 수개월간 그 텍스트가 익숙해졌겠지만 처음 보는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다른 요소들은 부차적인 '나머지 요소'들로 전락한다. 무대 위에서 오로라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것은 황홀한 일이다. 하지만 텍스트가 오로라를 반복적으로 선창하고 ("오로라, 라, 라, 라 ...") 그것을 비쥬얼로 보여준다면, 그러한 인터렉티브는 잠시 신기할지언정 그동안 재현적인 연극에서 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쪼록 건투를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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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저의 2014 두산아트랩 리뷰 연재를 마칩니다. 함께 해주신 예술가 여러분과 독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4년 9월 1일 월요일

두산 아트랩: 이파리드리, <별일없이 화려했던>

백인경

북적거리는 도시 속을 느릿하게 미끄러져 가는 버스 안에서 뒷좌석에 몸을 묻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본다. 지나는 거리마다 차와 사람으로 가득하다. 모두들 빠르고 익숙한 몸짓으로 각자 제 갈 길을 가느라 바빠 보인다. 두산 아트랩 하반기 공연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는 마음은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사이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린 길 위의 풍경 때문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광장은 이렇게나 넓고, 하늘은 이렇게나 높으며, 시간은 이렇게나 빠르게 지나가는데, 몸과 마음은 버스 뒷좌석에 묻힌 채 덜컹덜컹 고빗길을 넘어간다. 지금 여기, 우리가 속한 이곳은 누가 어떻게 만들어 놓은 세계인가. 우리는 어떻게 지워지고 있으며 또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역사가 한 권의 책과 같다면, 우리의 지금 이 순간들은 어떠한 문장들로 서술될 것인가. 세상이 한 편의 연극과 같다면, 내가 존재하는 이곳은 어떠한 장면들로 구성될 수 있을까?


이파리드리의 <별일없이 화려했던>은 별일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20대를 노래한다. 두 명의 배우와 두 개의 큐브가 엎치락덮치락하며 평범한 2000년대의 나날들에 매듭을 엮는다. 자취방, 과방, 할아버지의 장례식장, 연구실, 동네 호프집… 장소가 바뀌고, 옷이 바뀌고, 유행가도 바뀌고, 이상형 마저 핑클에서 소녀시대로 바뀌어 가지만, 한 해 두 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그들은 달라지지 않는다. 기현은 여전히 기현이고, 성우는 여전히 성우이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이지만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20년 지기 절친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특별한 사건 사고 한 번 일어나지 않는다. 단순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친근한 기억들(souvenir)과 과장된 몸짓은 관객들로 하여금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구성 속에서 예의 그 공감의 정서를 느끼기보다는 보편적 추억이라는 게 한편으로는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 직면해야만 했다. 무대를 중심으로 기역(ㄱ)자로 배열된 객석에서는 동시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건너편의 관객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아롱다롱한 추억 속으로 채 빠지기도 전에, 나의 지난날들을 돌이키기도 전에, 먼저 웃고 먼저 끄덕이는 낯선 사람들과 대면해야만 하는 것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무대 위에 펼쳐진 이야기가 다양한 의미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때 그 시절의 낡은 기념사진 같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것이기에 특별히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똑같은 표정들로 가득한 단체사진처럼.

아프니까 아직 청춘인 건지 청춘이라 아직 아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하고 나 또한 별다를 것도 없지만, 그러니까 괜찮다는 말은 정말로 괜찮은 걸까? 잔잔한 호수라고 해도 그곳을 건너기 위해서는 얼마나 열심히 물장구를 쳐야만 하는가. 호수에 내던져진 이상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헤엄치는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헤엄칠 수도 없고, 또 헤엄의 방식에는 정답도 없다. 어쩌면 나는 극장에서 나마 너무너무 진부해서 오히려 신선한 무언가를, 아니면 너무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놀라운 무언가를, 뭔가 그런 것을 발견하기를 기대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밥 한 끼 하자는 정겨운 인사조차 무색해지는 요즘에는 특히나 별일 없이 산다는 것이 무얼까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

2014년 8월 31일 일요일

모호, 이런 꿈을 꾸었다.

by 에스티

"몽유병환자처럼 잠시 동안 걷는 작가의 경로를 따라온다면 아마도 꿈의 뚜렷한 혼잡함과 삶의 환경들의 다루기 불가능한 뒤섞임의 유사점을 발견할 것이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꿈 연극> 작가의 말에서 (조성관, 홍재범 역, 연극과인간, p.7)

조명기, 사다리, 청소기. 본 공연이 시작되기전 오프닝 매치가 한 차례 있었다. 공연 시작 전 갑자기 뻥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기 하나가 터졌고, 램프 파편이 무대에 흩어졌다. 관객들은 깜짝 놀랐고 무대 위에서 졸면서 꿈을 이야기해주려고 기다리던 배우도 하마터면 부상을 입을 뻔 했다. 잠시 졸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던 배우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남윤일 PD가 곧 설명한 것처럼, 공연이 아니라 사고였다. 공연 시작은 잠시 지연되고 무대 위엔 커다란 사다리와 청소기가 나타났다. 이런 돌발 상황이 배우나 관객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린 측면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극장의 생얼을 구경하는 것도 관객으로선 색다른 재미다. 다들 무대의 fantasy를 기대하면서도, 환상이 제거된 민낯을 보고 싶은 욕망도 함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 공연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원작인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도, 윤성호 전진모 두 작/연출가의 이전 작품도 접해본 적없고, 심지어 출연하는 배우들도 대부분 낯설다. 나는 첫대면에서 말을 잘하는 편은 못된다. 그럼에도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심지어 <몽십야>도 인터넷에서 찾아 급하게 읽었다. 이 공연의 제목이자 첫 대사이기도 한 "이런 꿈을 꾸었다."는 소설을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거칠게 나마 낭독 공연의 형식과 장면의 극화가 접목된 형식으로 난 받아들였는데, 솔직히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유를 몇가지로 생각해보았는데, 우선 이 공연은 나보다 더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을 모델 관객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고, 최소한 원작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즐길만한 공연을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제인 "꿈"의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뭔가 집중이 잘 안되고 '졸립다면' 그건 그만큼 꿈을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객석에 앉아서 조는 걸 즐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꿈 이야기인데 너무 말똥말똥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진짜 꿈 같은 연극이라면 일단 졸리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떤 공연이 관객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걸 무의식이 활동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지금 내 기분은 어제밤 어떤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해 갑갑해 하는 그런 심정과도 닮아 있다. 어쩌면 다가가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 꿈'이 아니었기 때문일른지도 모르겠다. 소설 원작의 에피소드나 그걸 가져온 공연에서 서술되는 꿈들은 흥미로운 게 많았다. 다만 무대에서 서술자를 통해 꿈이 이야기될 때 그 이야기는 관객을 직접 청자로 놓고 이야기 되기 보다는 어딘가 비껴 있다. (배우가 앉아 있는 의자의 각도가 이미 45도로 틀어져 있다.) 객석에 앉은 나는 그 이야기를 훔쳐 듣게 된다. 스토리텔링을 훔쳐 듣고 있는 느낌이랄까. 화자는 육신을 입었으되 청자는 명확하지 않다. 1인칭 화자와 eye contact이 되지 않으니 (소설에서는 독자가 문자를 응시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으나) 나의 우둔한 내 머리는 이내 집중을 놓쳐 버린다. 연출이 이번 공연에서 의도한 것은 생생한 꿈이 아니라 '아스라한' 꿈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느낀 것도 이 아스라함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까?


2014년 8월 22일 금요일

별일없이 화려했던

이파리드리, 별일없이 화려했던

에스티의 첫날밤에

약 4개월 간의 휴식이 끝나고 아트랩 공연이 재개되었다. 그 4개월 동안 대한민국은 밑바닥으로 계속 가라앉고 있다. 애써 감춰왔던 우리의 밑낯이 그야말로 낱낱이 드러난 것만 같다. 40일간 단식을 하는 사람, 그와 함께 단식을 하는 사람, 그를 대신해서 단식을 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시위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 이제 그만 지겹다고 하는 사람도 목소리를 높인다. 온 나라가 짜증과 분노와 우울증에 빠져들고 있다.

맛있는 걸 먹는 것도, 아니 배고프다고 느끼는 것도 미안한 상황이다보니, 주변 사람에게 연극 보러 간다고 말하기 민망할 뿐더러 나 자신도 마음이 흥하지 않는다. 관객들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영화인들에 이어 연극인들마저 광화문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영화 <명량>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관객들이 영화속에서나마 현실의 리더쉽 부재를 보고 싶어서 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단 한순간의 희극적 이완도 허락하지 않을만큼 엄숙하기에 이 상황에서 영화를 보며 즐긴다는 게 그나마 덜 미안하게 느껴져서이리라.

이파리드리의 "별일없이 화려했던"은 내 또래의 두 남자가 살아온 10여년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사소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친숙하다. 오늘 극장을 찾은 관객의 절반 정도는 아마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장면 마다 최소 한번 쯤은 공감의 웃음을 이끌어 낸다. 그야말로 별일 없지만 80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무대 위에서 특별한 '극적'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11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조금씩 벌어져 있다. 원하는 것을 하고 살지만 뜻한 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은 기현과, 인생 재미로 사는 게 아니라며 순응하되 열심히 살고 번듯한 직장을 얻은 성우. 이 둘은 매 장면마다 옷을 바꿔 입으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상대에게도 관객에게도 속내를 직접 털어놓지는 않는다. 관객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기현에게서 좋은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버는 성우를 부러워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고, 직장도 있고 이제 가장이 되는 남부럽잖은 성우가 청춘이 마감됨을 안타까워 하는 것도 눈치 챌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 좋게 말하면 보편적 정서를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줄거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텅빈 무대에서 장면마다 큐브를 통해 장소를 암시한다. 연출은 "지극히 일상적인 극을 몇 가지 큐브로만 표현한다는 것이 자칫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했는데, 기타, 노트북에 서류 더미들을 비롯하여 카스 맥주, 맛동산, 신라면과 같은 세세하고 리얼한 소품이 위험성을 다 덮어 버린다. 그러한 소품들이 관객들에게 즉각적으로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데 효과적인 건 사실이지만, 한입 먹고 남겨진 신라면처럼 일회적으로 소모된다면 큐브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이야기는 2010년에 시작해서 1999년으로 갔다가 다시 2010년에 끝을 맺는다. 각 에피소드에서는 그 해를 기억하게 하는 인물들, 물건들이 언급된다. 몇년 후 이 작품이 다시 공연되면서 2014년, 그들이 서른 넷이된 해가 덧붙여지면 어떨까?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로 그려질까? 그때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2014년 8월 5일 화요일

트리스탄 샵스 (Tristan Sharps) <공간을 깨우다: Face to Face>

이흔정의 DRAMATIC.CITY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공연(사실 워크숍 발표라고 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얘기하고 싶다. 7월 19일 단 하루, 2회에 걸쳐 진행된 이 공연은 무료였지만 한 회에 단 40명의 관객만이 허용되었다. 주최측에 따르면 티켓 오픈 후 불과 5분 만에 신청이 마감되었고, 이번 공연을 본 사람들은 소위 ‘광클’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장소 특정적 공연(site-specific performance)” 이라 이름 붙인 공연은 대부분 관객들이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관람하도록 되어있어 이는 불가피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다 보니 여기에는 마치 ‘한정판’이 비싼 것을 이해하라고 하듯, 애초부터 관객을 묘하게 낮은 위치(?)에 놓이게 하는 힘의 작용이 있었다.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내가 초대해줬으니까 음식이 혹시 별로라도 맛있게 먹어”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이 공연을 본 사람은 겨우 80명에 불과하다. 그 중 한 명으로서, 부족하더라도 글을 남기고 공유해야 할 책임감과 익명의 누군가가 이 글을 참조하게 될 상황에 대한 부담을 느끼며 글을 시작한다.


구서울역 로비, 사진출처 서울역284 http://seoul284.org/ 

공연의 제목처럼 연출가 트리스탄 샵스와 연행자들은 ‘문화역서울284’라 개명한 구 서울역을 깨웠다. 그리고 관객 역시 이 공간을 깨우는 것에 동원되었다. 불과 5일 동안 진행된 워크숍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트리스탄 샵스가 서울역에서 발견해낸 ‘감시(surveillance)’라는 주제와 그것을 풀어낸 방식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했다. 관객들은 먼저 구 서울역의 중앙홀에 모여 안내를 기다린다. 12개의 거대한 석재기둥과 돔 형식의 높은 천장을 지닌,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공간 안에서 관객들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오래된 건물에 들어서면 새롭고 깨끗한 공간에서 보다는 편안함을 느끼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신경이 날카롭게 긴장된 이유는 곳곳에 배치된 정장차림의 요원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국가정보기관이라는 명찰을 목에 건 흰 셔츠와 검정 바지의 요원들이 무작위로 관객 두 명씩을 각기 다른 방으로 안내한다.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있고 인적 사항을 조사하는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직업, 나이, 시민단체 가입여부 등을 묻고 사진 촬영에 대한 동의를 구한다. 관객은 그 질문에 답을 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과연 몇 명이 성실한 답변을 하고 몇 명이 답변을 거부했을까, 혹은 거짓말을 했을까. 누군가는 이 인터뷰를 다소 신기한 퍼포먼스의 일부로 즐겼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공연이라는 거리감을 깰 정도의 불쾌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의식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도록 강요당했는지도 모르겠다. ‘감시’ 라는 주제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관객들의 공연 해석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관객들은 자유롭게(그리고 동시에 사뭇 경쟁적으로) 구서울역을 누비고 돌아다닌다. 왜 경쟁적이라고 느꼈는지를 먼저 말하자면, 공연을 안내하는 주최측이 관객의 적극성에 따라 볼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고 끊임없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출가 샵스가 발견했듯이 서울역에 유난히 많은 ‘유리창’ 때문에 관객들이 서로를 계속해서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유리창 밖에서, 때로는 유리로 된 천장 위에서까지 요원들이 관객을 계속 감시 혹은 관찰하고 있었다. 감시라는 주제는 사뭇 단편적이었지만, 실제로 자유롭게 관람하도록 안내 받은 후에 감시를 당하고 감시 당하는 누군가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깨어나는 감각과 감정은 퍼포먼스에 직접 속해있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관객은 구서울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 초반에 인터뷰한 자신의 모습이 영상으로 녹화되어 재생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동시에 떨어져 있는 방이라 할지라도 이쪽 방의 모습이 카메라로 녹화되어 저쪽 방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재생되고, 공연 내내 건물은 완전히 폐쇄되어 있었지만 서울역 외부의 현재 상황도 모니터에 재생된다. 4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동안 모든 것이 감시되고, 기록되고, 매개되고, 재생된다.



이 같은 전체적인 주제 및 콘셉트는 흥미로웠지만 이번 공연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연행자들의 퍼포먼스가 다양하지 못했고 연행자들의 에너지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층 홀에서 연행자들은 굳어버린 조각상처럼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주제나 의도와 상관없이 몸의 움직임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다소 약한 느낌이었다. 관객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조각상이 있어야 할 곳에 살아있는 사람이 올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각상보다 관람자의 시선을 끌어당기지 못했다. 그리고 비슷한 동작이 지하에서 반복되고 마지막에 1층 중앙홀에서도 다시 반복되면서 긴장의 정도가 더욱 떨어졌던 것 같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어느 곳보다 정치적인 기운이 역력한 그 곳에서 연행자들의 동작은 ‘억압, 고통, 죽음’과 같은 것을 연상케 했는데, 몸의 에너지보다 그것에 부과된 의미가 강한 느낌이어서 조금은 인위적이었던 것도 같다. 아마 연행자들의 몸과 동작이 건축물에 녹아 들지 못한 것은 그 공간과 교류한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식 공연을 위한 예비적인 쇼케이스라고 하니, 정식 공연으로 발전시켰을 때에는 보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구서울역을 ‘깨우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공연을 보고 나왔을 때 구서울역 바로 앞에는 그 날도 집회가 한창이었다. 여느 때처럼 경찰도 보였고, 노숙자는 여기 저기에 앉아있었고, 여행객과 비즈니스맨들은 바삐 움직였다. 장소 특정적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40분 간 구서울역에서의 경험은 2014년의 서울역과 어딘가 모르게 매우 단절된 느낌이었다. 이것은 개인적인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공연은 구서울역을 깨워야 했다면 “왜” 깨워야 하는지를 더욱 고민했어야 되지 않을까? 또한 지금의 관객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게 할 것인지 조금 더 깊은 고민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장소의 역사와 기억을 깨웠다면 그것을 ‘현재’에 연결해 주어야 동시대에 그 공간을 깨운 것이 의미 있을 것이다. 연출가 스스로 밝혔듯이 연출가가 스스로 장소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서울역이 ‘장소 특정적 공연의 거장’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번 공연의 연출가 트리스탄 샵스는 구서울역을 하나의 일상적인 ‘기차역’이라기 보다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건물로 받아들인 것이 자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연출가는 그가 주로 작업했던 백화점, 공원, 지하철역 등과 같은 일상적 장소 중 하나로, 단지 아티스트에게 창작의 영감과 즐거움을 주는 독특한 건축물로 구서울역에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출가와의 대화에서 샵스는 연행자들의 동작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생각했던 것이라고 밝혔는데,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다가왔을지는 의문이 든다. 건축물의 물리적인 속성과 그것에 반응하는 퍼포먼스를 탐구할 것인지, 건축물의 사회적, 역사적 장소성을 탐구할 것인지는 연출가의 선택인데, 후자를 선택한 경우에 보다 조심스럽고 진지한 태도가 요구됨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관객이 어떤 태도로 공연에 접근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연출가의 접근방향이 어찌되었건, 앞서 말했듯 아주 제한된 인원이 참여했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공연 후 연출가와의 대화에서 오갔던 질문들로 추측해 보건대) 관객 중에는 일반 대중보다는 관련 전공자로 서울역이라는 장소보다는 ‘장소 특정적 공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관객들이 이번 공연에서 느꼈을 경험과 감정의 편차가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장소 특정적’ 공연이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발하기 위해서는 “그 장소에서 생활한, 그 장소를 처음 방문한, 그 장소를 소유한, 그 장소에 출입이 금지되었던, 그 장소가 불쾌한, 그 장소가 애틋한(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관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간’이라 부르지 않고 ‘장소’라 부르는 것은 그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시간, 사건, 감정, 기억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선택된 장소가 관객에게 일관된 의미와 경험을 전달할 뿐이라면, 그것이 블랙박스씨어터나 화이트큐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관객이 다소 편향된다는 것, 공간에 대한 탐구와 장소에 대한 탐구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장소 특정적 공연(이라고 칭하는 공연)에서 아쉬운 지점이다. 하지만 역으로 개념이 실천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기에, 현재 진행 중인 장소 특정적 공연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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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일 토요일

뒤늦게 스텔라의 "마리오네트" 뮤비를 보다

에스티

1.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별star과 별자리constellation의 어원적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라틴어 어원 stella를 얘기하던 중이었다. 나는 스텔라 얘기를 하면서 그 아이들은 소문으로만 들어 겨우 알고 있는 현대 스텔라를 예로 들고 싶었다. 그런데 앞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내가 스텔라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자 마자 자동적으로 미묘한 탄식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윽고 다른 아이들도 뭔가 음흉한 웃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7세 남자 고등학생들이 그런 일관된 반응을 보이는 건 단 한가지 밖에 없는데, 불행히도 나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스텔라를 알려주려고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 택시로 쓰이던 차를 예로 들려고 했던 나의 불찰이 컸다.

이제 내가 학생들에게 배워야 하는 상황이 왔고, 학생들은 기꺼이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스텔라—공식 스펠링은 Stellar인 듯한데, 통상 Stella라고 쓰이고 있다—는 걸그룹의 이름이며, 그 이름은 무척이나 선정적인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얼마나 야하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져서 오늘 집에 돌아가서 확인해보겠다고 했더니, 학생들은 나에게 세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하나는 부인 몰래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마도 소리를 죽이고 엄마 몰래 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심어린 충고가 아닐까 생각된다.) 마지막 조언은 다름 아니라 “성인 인증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2.
“참혹하다. 한국 대중음악은 외형적으로는 'K-pop 한류'라고 해서 대중음악 산업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는 진정한 의미의 음악을 학살하고 난 뒤 얻은 대가다. 링컨이 그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순간적으로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한다"라고. 한국의 음반 산업은 IMF를 지나면서 한번 몰락했다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극적 도약에 성공했지만, 음악이 아닌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청년들에게 가혹한 복근을 강요함으로써 성공을 거뒀다. 이런 것은 역사의 시간으로 보면, 한순간 존재하는 페이크(fake)일 뿐이다. 이제 음악은 휴대전화 컬러링처럼 아무 때나 바꾸는 배경음악을 만드는 자나 소비자에게나 그냥 1회성 소비재일 뿐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 평론가이자, 나 스스로 대한민국의 몇 안되는 1급 문화예술 비평가라 평가하는 강헌 선생이 한 인터뷰에서 2014년 현재 우리 대중음악에 대해 한 말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이 기사를 읽으면서 “음악이 아닌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청년들에게 가혹한 복근을 강요함으로써”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복근을 언급함에 있어서는 스스로를 “걸신”이라 부를만큼 미식가, 혹은 음식 애호가인 강헌 선생이 남자 아이돌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의 대목에서는 일차적으로 소녀란 말에서 소녀시대가 떠올랐지만, 그와 함께 그제서야 스텔라가 떠올랐다.

3.
이 뮤비가 공개된 지 거의 반년이 지나고서야 나에게 소식이 들려왔다는 건 이 프로모션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흥미로운 점은 유튜브의 조회수가 470만을 넘겼다는 것보다 시청자들이 남기고 간 흔적에 있다. 이 뮤비에 대해 시청자 중 3만 2천여명이 '좋아요'를 클릭했는데, 그에 못지 않게 2만 9천여명이 이 뮤비가 싫다고 표하고 있다. 이 수치는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는 개리의 “조금 이따 샤워해” 뮤비나 가인의 “피어나” 뮤비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를 나타낸다. 이 두 뮤비에도 '싫어요'가 없지 않지만 '좋아요'에 비해 지극히 작은 수에 불과하다. 보통 정치적으로 논쟁 거리가 있을 때에나 찬반이 비슷한 숫자로 표시되기 마련인데, 도대체 이 뮤비는 뭐가 문제였길래 시청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안좋았음’을 표하게 만들었을까?

가사를 대충 살펴보면, 화자는 헤어진 연인에 대해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상태인데, 그 연인은 다시 돌아올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연락을 한다. 옛 연인에게 놀이감 밖에 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화자는 자신을 “너에게 찢기고 아프고 아픈 인형” 마리오네트에 비유한다. 실연의 아픔과 자기 연민을 노래하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다.

안무 또한 제목과 가사 내용에 호응하여 끈에 메달린 인형을 재현하는 동작이 적지 않게 들어가 있다. 그렇지만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멤버들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나머지 동작들이다. 무엇보다 “지울 수가 없는 너니” 부분에서 반복되는 움직임, 즉 두 팔을 등 뒤로 뻗어 잡고, 오른 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 딛은 다음 엉덩이를 반시계방향으로 느리게 3회전 하는 대목과, 뒤로 돌아 자기 엉덩이를 손으로 밀어 올리는 동작은 요즘 언론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충격적”이다. 게다가 카라가 “미스터”에서 선보인 엉덩이 춤이 펑퍼짐한 의상을 입고 이루어진 반면, 스텔라는 이 춤을 레오타드를 입고 추고 있으니 이 정도면 국내 심의가 허용하는 최대치라 할 수 있다. 이 영상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의 언론 반응을 보면 이 정도면 19금이 아니라 “29금”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관련된 대부분의 기사는 노이즈 마케팅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텔라 멤버들이 이 뮤비에서 마리오네트를 재현하는 것은 텍스트의 요구로 보인다. 노래 가사를 대충이나마인지한 시청자들은 미련 때문에 여전히 끌려다니는 (아마도) 여성 화자에게 감정 이입을 시도하게 되고, 그리고 그게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이라 여기게 된다. 하지만 멤버들의 몸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그들의 춤은 그 자체로 상품화된 인형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몸의 관능성이 텍스트와 충돌을 일으킨다. 마리오네트 같은 처지의 화자의 마음에 공감하기는 커녕 기획사 사장님이 내건 줄에 자기 몸을 맡긴 네 명의 인간 인형을 보게 되니, 이 모순은 결코 즐거운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리오네트”라는 제목은 역설적이지만 이 뮤비의 핵심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4.
순전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눈높이에 다가가고자 “마리오네트” 뮤비를 찾아보았으며, 순전히 이 글을 쓰기 위해 반복해서 보았음을 힘주어 밝힌다. 나는 무려 데뷔한 지 3년이나 된 스텔라를 오늘에야 알게 된 문외한이다. 혹 스텔라의 팬들이 이 글을 읽고 불쾌했다면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싶고, 어떤 점이 좋은건지 알려주길 희망한다.

참고자료

마리오네트 공식 뮤비
http://www.youtube.com/watch?v=NCQpzHPYRUc

No Cut Version
http://www.youtube.com/watch?v=ObmOW5GZRP8

http://heungseon.com/5704 (가사 참고)

강헌 인터뷰 전문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049

2014년 7월 30일 수요일

화학작용_선돌편 시리즈와 “일회 공연”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화학작용’ 선돌편 : 7/9~8/31, 선돌극장> 


 스무 개의 극단(혹은 그룹)이 자생적으로 모여 하나의 축제를 만들고 있다. (축제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고, 아마도 이 글이 게재가 되는 시점에도 끝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7/9~8/31, 선돌극장) 이들이 만들고 있는 축제의 이름은 ‘화학작용’이다. 예기치 않은 극단들이 우발적으로 만났을 때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가. 이 질문을 시작으로 기획된 축제의 프로그래밍은 오롯이 우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토너먼트 식으로 제비뽑기를 하여 편성된 두 개의 팀이 한 회 차의 공연을 구성하는 식이다. 현재 네 번째의 공연 순서까지 진행이 되어 총 여덟 개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화학작용’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 공연들의 프로그래밍은 어쩌면 독립된 기획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 수도 있겠다. 기획적 컨셉을 축제의 이름으로 내 건 숱한 ‘축제식’ 공연들은 기획이 과잉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기획이 작품을 압도하여 정작 작품의 색채는 기획의 그늘 아래 퇴색되어버리고 마는, 작품의 목소리가 기획이라는 테두리선에 부식되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비단 축제 공연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연의 목소리가 기획의 틀에 의존해버리고 마는 요즘의 숱한 과잉 기획의 공연들 가운데 오히려 기획의 독립성이 부재한 ‘화학작용’ 속 공연들은 솔직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이란 조금 우연하고도 계산되지 않은 채로 발생한다. 이것은 으레 축제 혹은 기획이라는 틀 거리 안에서 하나로 규정되어 왔던 것들, 그러나 규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전면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채 계산되지 않은 스무 개의 공연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의 층위가 흥미롭다. 그리하여 이것은 더욱 축제로 다가온다. 스무 개의 극단이 조금 거칠고 솔직하게 모여 있고, 그럼으로 비로소 ‘모여 있다’라는 느낌, ‘우리’가 ‘여기, 이곳’에 ‘모여 있다’라는 느낌을 실물로 전달하는 힘을 지닌 축제.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굳이 이 공연의 묶음을 축제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 공연 전체에 대한 리뷰는 축제가 끝나갈 즈음에 다시 쓸 것을 기약하며, 이 글에서는 세 번째 공연 팀에 속해 있던 구자혜 연출의 <일회 공연>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일회 공연>
일시 : 7/20~7/24, 선돌극장
관극일시 : 7/21, 선돌극장
연출 : 구자혜
작가 : 고연옥, 김민정, 백하룡, 이리, 전소영, 오세혁, 정소정, 구자혜, 윤성호, 미하엘 뮐러
출연 : 이리, 장윤실, 박경구, 전박찬, 최순진, 김석기

공연화된 대본의 조각들 :
2006년   고연옥 작 <칼디의 열매>
2007년   김민정 작 <검은 입들의 집>
2013년   구자혜 작 <침입>
    년    미하엘 뮐러 작
2012년   윤성호 작 <미인> 그리고 <미인> 중 공연되지 않은 <누수공사를 기다리며>
2012년   이리 작 <배우L의 독백 - 훈제란과 자전거 도둑에 대하여>
2012년   전소영 작 <오늘의 날씨>
2010년   정소정 작 <뿔>
2001년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2008년   윤성호 작 <당신에게>
흥얼거림 : 미하엘 뮐러 중 마지막 페이지 노래 부분 (미하엘 뮐러 부름)


#
  <일회공연>에서는 발표는 되었으나 무대 위에 상연되지 못한, “태어났으나 태어나지 못한 문장들”을 모아서 무대 위 장면으로, 혹은 무대 위 장면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 그 미완의 생명들을 소생시킨다. 고연옥, 윤성호, 전소영, 정소정, 백하룡, 이리 작가 등의 작품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르지 못했던 작품의 파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무대 위에 꺼내어 놓는다. 시작부터 날카롭게 집중력을 모으게 했던 것은 바로 작품이 꺼내어 놓은 이 시선 자체가 지닌 힘 때문이었다. 탄생했던 것의 죽음, 죽은 것의 소생, 탄생과 죽음과 소생 그 사이를 둘러싼 것들. 혹은 탄생과 죽음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조차 없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그것들의 사이를 오고 갈 시선의 힘이 왠지 몹시 반가웠다. 이 공연을 보는 동안 무언가를 애써 에둘러 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선의 힘으로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작품이 취하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사이를 떠도는 시선은 채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한 무대의 잠재 혹은 무대의 잔재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 보게 하는 쾌감을 자극한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결코 구경할 수 없었던 분장실 속 물건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불가능하고도 은밀한 쾌감 같은 것이다.


# 윤성호 작 <미인>의 한 장면
  한창 사랑을 하고 있는 듯한, 그러나 (까닭모를) 이별을 앞두기라도 한 듯한 연인이 등장한다. (사실 이 이별은 군 입대를 앞두고 하는 이별이지만, 군 입대라는 상황에 대한 서술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다가 더욱이 이 장면은 문맥이 생략된 채로 보여지는 만큼 이 둘의 이별은 까닭 모르게 다가온다.) 그렇게 문맥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연인이 등장한다. 이 둘은 그들이 처음 호감을 가지게 되었던 순간을 회상하고 재연한다. 모든 연인에게는 처음이 있다. 그것은 돌이켜 보고 난 후에야 아는 것이지만. 모든 연인에게는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있다. 그것은 명백한 장면으로 존재한다. 그 장면으로 인해 그들이 보낸 한 시절은 마치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장면과 기억, 기억과 또 다른 기억, 사실, 사실과 기억된 사실, 망각. 그들은 첫 순간을 복원해내며 이 단어의 사이와 사이를 떠돈다. 이 둘은 그토록 선명했(으리라 믿었)던 첫 순간을 복원하려 들지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알 수 없는 관객으로서는 그 첫 순간이 한없이 불투명하다. 이것은 어쩌면 모든 ‘순간’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안다한들, 아니 그것이 설령 우리 스스로의 사건이라 한들, 우리는 어느 순간 순간들의 행방을 투명하게 알 수 있을까.
  이 작품이 말하려 하는 생략, 어느 소소한 망각,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죽음들과 그것들을 소생시키려 하는 의지와 같은 것이 작품의 초반을 여는 이 장면에서 가늘고도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이 장면을 둘러싼 모든 까닭모를 미완성과 그 미완성 한 가운데 서 있는 어느 한 순간의 미완성이 한데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 장면 안에서는 어떤 맺혀진 순간의 힘이 강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것, 존재했던 것, 기억을 초월한 기억. 어쩌면 이 공연은 생략된 문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사라졌으나 존재하는 것, 흔들리면서도 고요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 이어지는 윤성호 작 <미인> 가운데 “누수 공사를 기다리며”
  반복되는 말들,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말들, 점증되는 짜증과 불신, 그럼에도 또 다시 반복되는 헛소리들, 계속해서 지연되는 시간,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그 상태. 이 장면이 시작될 때 배우들이 지면 속의 카툰처럼 벽면에 붙어 서 있다가 차츰 연극 속의 인물로서 호흡을 찾아가며 무대 위로 서는 동작이 흥미로웠다. 텍스트에서 연극으로, 그 테두리를 넘는 행위를 보여주는 움직임. 죽어 있던 것의 호흡, 생략된 것의 복원. 그리고 바짝 무대 앞 선까지 나온 이들이 한 줄로 정렬하여 반복되는 대사를 읊고 그 대사들의 반복은 시간과 정서의 점증을 빚어내는데, 이 장면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방식 또한 흥미로웠다. 그토록 정지된 화면 속 인물들처럼 서 있으면서도 정서와 시간의 부피를 증폭시켜내는 힘이란! 객석을 향해 일렬로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들은 지극히 제시적이면서도, 폭발적이다. 이것은 마치 소리 없는 텍스트가 빚어내는 감정과 시간의 증폭 같았다. 다시 말해 연극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독서의 행위 같았다. 관객은 무대 위 장면을 마주하고 있으나, 이 장면이 만드는 효과는 독자가 텍스트를 마주할 때의 효과였기 때문이다. 독자가 텍스트를 묵독할 때 텍스트 속의 기호는 낱낱한 문자들일 뿐이나, 독자가 그 기호의 결 사이 사이에서 숨을 쉬며 기호라는 질료를 자신의 감정으로 증폭시키는 묵독의 과정, 그 내면의 행위를 무대 위로 뽑아 표현한 듯한.
  이 대목 즘에서 생각했다. 이 연극 왜 이렇게 재미있지? 그 이유는 (그 숱한 메타 연극들이 저지르고 마는 식상한 화법들처럼) 나 이렇게 논다, 하고 자기가 얼마나, 어떻게,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텍스트와 노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다양하게. 반복되고 늘어지고 지연되고 인내하는 언어의 힘으로 장면의 운동을 만들고, 그 운동 안에서 다시 언어는 지루하고도 의뭉스럽게 몸을 비벼대고 있다. 텍스트가 연극 안에서 놀고, 그 놀이 안에서 연극은 장면이 만들어낼 수 있는 능청스러운 몸짓을 보여준다.


# 이리 작 <배우 L의 독백>
  정말 잘 하고 싶어하‘는데’, 정말 잘 해 보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파토가 나버린 일처럼. 이를테면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공연 때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서자 했‘는데’, 갑작스럽게 내일 포스터 촬영을 한다고 하고.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루라도 해 보려고 훈제란을 샀‘는데’, 그 훈제란을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혹은 너무 쉽게 바닥에 떨어뜨려버린 일처럼.
  세상에 정말 잘 나오려 했‘는데’, 그렇게 잘 나와서 잘 살려 했‘는데’........... 나오자마자 의미를 상실해버린, 혹은 의미를 박탈당해버린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언어. 그래서 ‘그냥’ (별 각인 없이) 죽어버린 역을 맡은 배우의 목소리로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곧 연극 자체가 되게 하는 연출의 방향이 흥미롭다.
  이 공연의 전체적인 할 말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 스토리텔링을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러가 이 공연 전체의 공기를 오롯이 자기의 이야기 속에 실어내었다. 이 연극은 이런 연극입네, 특히나 이 연극은 이런 ‘메타’ 연극입네, 하면서 연출자나 배우가 직접 나서서 서사를 풀어 놓는 그 숱한 연극 놀이들을 만나 왔지만, 이 작품만의 표현 방식은 특별했다. 지극히 재미없을 수도, 복잡하기만 할 수도 있었던 첩첩 쌓인 메타 서사를 특별하지 않게 풀어내면서도 귀에 유유히 전달되게 하는, 자연스러움과 집중력. 아 좋은 스토리텔러의 힘이란!
  이 장면의 연기를 한 배우가 사실은 이 장면의 언어들을 만든 작가(이리) 본인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난 후, 이 장면에서 만들어 낸 ‘메타의 메타의 메타 속 이야기’는 ‘작가의 작가의 작가 속 작가’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 공연조차도 관객의 입장에서 관객에게 드러나지 못했을 법한 것들이 구태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식을 하면서 보고 있지만, 이 모든 사라질 뻔한 것들의 운명은 어떤 글을 세우고 부수고의 연속선 안에서 때로는 살아남았고, 때로는 사라졌을 어느 창작의 형체를 둘러싼 것들이다. 창작의 입장에서 창작이란 이토록 불명확한 과정임에도, 수용자에게 창작은 마치 그것이 명확한 테두리를 지닌 무언가로 여겨진다. 하여 미완된 작품의 생략을 복원해내고, 완성된 작품의 허물을 허물어뜨리는 이 공연의 행위는 이토록 불완전한 창작자와 이토록 명백한(듯 보이는) 수용자 사이의 시선과 시차를 희미한 발짓으로 거스르고, 에둘러가는 데에 있다. 이 공연의 엔딩도 (윤성호 작 <당신에게>의 부분) 이러한 작가의 희미한 정체성에 화두를 실고 있다.

#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곧고 차가운 벽.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 너무도 잘 보인다. 서로 자기의 편에서 단 한 발도 저 편으로 섞이려 들지 않는. 아무리 그 방에서 괴로워하고 꿈을 꾸고 소통을 갈망해도 현실은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다. 그 차가움과 냉담함과 단절이 너무도 안정적이다. 빗금으로 그어진 조명 분리선. 그 선에 대한 인식 하나로 표현된 일련의 움직임들. 단절된 소통을 다급한 분노로 표현해내는 움직임과 다시 그 방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소통 같은 것)를 습기 차게 갈망하면서도 몸으로는 다시 단절을 인정하고 감내하는 자포. 그것의 반복이 너무도 안정적이고 차갑다. 여고생을 상처받은 사슴 같은 남자 배우가 연기한 것도 이 장면에서 전해지는 그 철저한 단절, 그 꿰뚫을 수 없는 냉기를 표현하고 있어서 좋았다. 가느다란 빗금 조명등과 가늘게 삽입된 crack 사운드. 단 두 가지의 질료만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장면일 뿐인데, 이 파편의 유희에서 작품의 질긴 공기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건. 이토록 파편의 시가 해 낼 수 있는 것을 미완의 연극으로 그려내는 건.


#
  발표되었으나 상연되지 못한, 상연되었으나 생략된 장면과 언어들을 ‘일회 공연’으로 올려 낸 이 작품. 이 작품의 소개를 받았을 때에는 그 생략된 것들에 생명성을 부여하는 연극이려니 했다. 그런데 연극을 보는 동안 내내 조금 특별했다. 그 이유는 이 연극이 자꾸만 빚어내는 어떤 사이를 떠돌고 있는 힘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생략이 아닌 생략이 되기까지의 것, 그래서 또한 부활이 아닌 그것이 되살아나기까지의 것. 우리의 인생처럼 이 연극은 순간이 아닌 순간과 순간 사이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작품 속 장면들은 오롯이 대본과 유희하고 있다. 대본을 연극으로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대본과 함께 놀고 있다. 그 대화가 즐겁다. 대본과 연극 사이의 유희의 대화가. 그래서 두텁고, 새롭고, 줄기차다. 기대할 수 있는 연출과 배우와 작가들을 만나게 되어 오랜만에 즐겁다. ㉦

2014년 7월 22일 화요일

다르게 읽은 콘서트, 좋아서 하는 밴드 <보신 음악회, 더워 The War>

산책

이 글을 쓰기 전에 두 가지 사실을 밝혀야 할 것 같다. 먼저, 좋아서 하는 밴드, 그들의 음악에 대한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이 친구에게, 또 <보신 음악회, 더 워 The War>라는 제목에 끌려 콘서트를 보러 갔다. 노래를 찾아 들고, 밴드에 대한 사전 정보들을 파악했다면 좋았을까? (노래를 다시 듣고 있는 지금 생각은, “그렇다.”이다)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나는 이야기, 서사, 기승전결, 드라마, 이런 것에 집착(?)한다. 잘 짜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집착한다고 내 자신을 다소 비하해서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비단 나만의 성향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무의미한 사물들에서도 이야기를 찾고, 만들어 낸다. Heider와 Simmel의 유명한 실험은 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이 실험에서 사람들은 원, 삼각형의 움직임을 사람으로 인식하고, 그 움직임을 탈출이라고 해석함을 발견했다.






그들의 노래는 아름다웠고 때로는 유쾌했고, (나는 모든 노래를 처음 들었지만,) 조용히 따라 부르는 주변의 나직한 목소리와 가끔 터지는 웃음 소리들이 좋았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과 같은 곡 소개나, “젬베를 사려고 밥을 굶었잖아요.”같은 이미 공유된 이야기들은 그들에 대한 궁금함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일종의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밴드의 멤버나 세션 소개가 공연 중반 이후에 치우친 것과 마이크 음량이 작아 가사나 대화가 잘 전달되지 않은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좋아서 하는 밴드(조준호(퍼커션, 우쿠렐레)와 안복진(아코디언, 건반), 손현(기타)), 상상 속의 그들은, 꽤 나이가 지긋하고(하지만 생각보다 모두 어리시고), 다른 일을 하면서 “좋아서” 밴드를 하는 뮤지션들이었지만(무지했다), 실제로는 전업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 분들이었다. 누가 보컬인지, 혹은 리더인지 궁금했지만, 공연이 끝난 후에야, 그들은 독특한 협업 시스템을 가지고, 각자 다른 악기를 연주하면서 자신이 쓴 노래를 자기가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출처: “내가 첫 번째였으면 좋겠어” 뮤직 비디오 중) 

밴드를 처음보고, 노래를 처음 들은 초짜 관객은(손현님 표현: 새 거) 노래와 노래 사이를 연결하는 대화들, 이야기들에 관심을 돌리게 됐다. 보신 음악회의 주된 기획으로 보였던 “닭들의 역습”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 아쉬웠다. 닭을 먹지 말자고 투쟁하던 그 분(닭 분장을 하고 나온, 그분 이름이 뭐였더라? 닭 대장이었던가)과, 더위를 이기는 방법들을 알려주는 뮤지션들의 대화는 그 완성도가 아쉬웠다. 메리홀이 아니라 작은 클럽이었다면, 혹은 이 기획 자체를 시도하고 노래만 들려주는 구성이었다면 모를까, 콘서트의 일부분으로 끼워 넣은 이상, 더욱 완성도 있는 쇼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콘서트 시작 전, 자신의 보신 음식을 적어 내라고 했다. 이름과 좌석 번호, 전화번호까지 적어서. 그러나 이 게시판은 삼계탕을 써 넣은 한 관객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또 갑자기 우쿠렐레를 선물로 주는 응모판 이상으로는 쓰이지 못한 점이 아쉽다. 관객들의 메모를 다양하게 활용했다면, 뮤지션들의 여름 나기 방법에 관객을 참여시키는 등, 무대와 객석이 보다 가깝게 상호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닭듥의 역습이라는 이야기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것이다(닭을 초빙한 밴드의 예상처럼 많은 사람이 삼계탕이나 치킨을 쓰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들이 그들의 노래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성이었다면, 노래에 대한 집중도도 더 높아졌을 것이며, 나 같은 관객에게도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유명한 그들의 팬들은. 라이브로 노래를 듣고, 웃고 감동하는 것으로도 더위를 이길 힘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없거나 그들의 지난 날과 사건을 공유하지 못하는 관객까지 쉽게 팬으로 만들려면,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대화,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노래 안에도 이야기가, 기승전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음들이 날아 오르며 저 멀리로 나아갔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 모양도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으며, 가사로 쓰여지고 불려지는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가스비를 걱정하며 보일러를 돌리는 남자의 마음을 상상하고(“보일러야 돌아라”), 깜짝 깜짝 놀라며 설레는 여자의 발그레한 볼을 떠 올리며(“얼굴 빨개지는 아이”), 감정을 같이 공유하고, 그래서 노래 듣기가 즐거운 것 아닐까? “굿 바이 스타”의 스타가 뮤지션에게는 10만 킬로를 달리고 폐차하게 된 스타렉스였다는 사실도 재미있었지만, 앞으로 “굿바이 스타”를 들으며, 그런 존재를 가진 관객들은 자신만의 그 무엇을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 기가 막힌 연주나 소름 끼치게 잘 부르는 보컬을 넘어서서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 그래서 때로는 울컥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짓게 되는 것. 그런 힘은 이야기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콘서트의 이야기가 더욱 탄탄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삼계탕이 아니어도, 그들의 노래를 모두 따라 부르지 못해도,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분명 <보신 음악회>는 좋은 기획인 것 같다. 5년째 이어오는 이 기획은 복날이면 그들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그들의 음악을 라이브로 듣는 것 이상으로 객석에 앉은 관객도, 팬도, 뿐만 아니라 뮤지션 그들도 무더위를 이기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서 극장을 나설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분명 있을 것 같다.
즐겁게 노래를 듣고 와서, 서사며, 실험 같은, 재미없는 이야기를 했다. 친구C는 내게 “또 머리로 들었구만.” 하고 퉁을 놨다. 마음으로 노래를 듣기에는, 좋아하는 밴드와 나, 우리가 보낸 시간은 너무 짧다. 시간을 붙잡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들과(김중혁 <모든 게 노래>) 마음을 나누려면, 앞으로 더 긴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모든 노래를 찾아서 (유료로 다운로드 받아서!)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내년에도 <보신 음악회>가 성황리에 개최되길. 저도 따라 부르겠습니다. ㉦

2014년 7월 13일 일요일

공연의 시간과 공간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Drama-Out 1
최희범 (<지극히, 퍼포먼스> 연출)

드라마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드라마(drama)의 어원으로서 행동하다는 뜻의 dran을 들며, 드라마가 다른 예술 양식들과 구별되는 점은 실제 인물들이 행동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지난 5월 서울대학교 두레문예관에서는 출연자들의 행위들로 꽉꽉 채워진 연극이 공연되었다. 서울대학교 공연예술학과 학생들이 만든 세 번째 공연 <지극히,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공연된 지 이미 한참 지나기도 했고, 공연 자체가 굉장히 유명해지거나 한 것도 아니지만, 이 웹진(drama-in)의 필진 대부분이 공연에 참여했고, 공연준비 및 공연 후유증으로 인해 한 동안 글이 많이 올라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약간은 변명이 될 것도 같은 공연 제작 후기를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첫 문장을 두서없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 시작한 이유는 이 글을 첫 번째로 하여 새로 시작해보려고 하는 연재의 제목을 drama-out*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행위로 꽉 찼던 우리의 공연이 그가 말하는 ‘드라마’는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연출로서 참여했던 <지극히, 퍼포먼스> 제작에서 시도해본 연극 혹은 드라마에 대한 일종의 실험의 내용과 나름의 결과를 소개하고, 이러한 것들을 계기로 앞으로 이 연재에 실릴 리뷰들이 공연을 보는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를 간략히 소개하려고 한다.

* 이 제목이 우리 웹진의 이름과 운을 맞춘 것은 사실이지만, drama-in의 “drama”가 어떻게 특정되어 있는지가 확실한 상태에서 그에 반하는, 혹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곧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조금 더 일반적인 의미의 drama를 생각했는데, ‘극적이다’ 혹은 ‘드라마틱하다’고 할 때 그런 드라마나 연극에서 공연의 측면보다 희곡 텍스트의 측면이 강조된 의미로서 사용할 때의 드라마 같은 것이다.

<지극히, 퍼포먼스>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드라마라고 불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출연자의 행위는 있을지언정 플롯이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인물들의 행동의 결합이 플롯이며 비극과 희극과 같은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플롯이라고 말하는데, <지극히, 퍼포먼스>에서는 행동들이 나열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어떠한 의도 혹은 목적 하에 촘촘하게 구성/결합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처음 화두는 “빈 공간, 2시간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들이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였다. 즉, 의식적으로 ‘드라마’가 아닌 것을 추구 했다기보다는 우리가 만들 공연의 기본 요소에 드라마가 속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없는 공연의 현장성(liveness)에 대한 실험의 성격이 강한 ‘연극’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이 공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이러한 요소들이 이렇게 표현되었고 결국 그 의미는 이러이러한 것이야’ 하고 이야기 될 수 없는 무엇인가, 그 시간에 그곳에 있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주인공이 된 공연이 가능한가?’ 현장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런 질문에 가까웠다. 비록 잘 짜인 스토리나 플롯이 없어도, 잘 생기고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매력적인 인물(character)로서 존재하지 않아도 무대에서 행위를 하는 사람과 그 시간과 그 공간에만 속한 멋진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를 실험하고 거기에 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의 출연자에 대해서 공연이 이루어질 시간과 공간에 진짜로 속할 수 있는 행위들을 찾아나갔는데, 이는 비단 공연에서 ‘연기’를 배제하겠다는 취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연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에 대한 실험을 했다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과연 연기는 관객의 존재로부터 시작되는가, 내가 아무리 무대에서 실제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나를 보는 누군가가 존재할 때 그것은 그저 밥 먹기의 수행(performance)일까, 아니면 밥 먹는 퍼포먼스(performance)일까? 어쨌든 출연자들에게서 ‘과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환영을 만들어 줘야 하거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처럼 보여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기로 하고, 이런 기준으로 우리 무대에서 ‘진짜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찾아서 공연을 구성했다. 이 행위들을 찾아서 장면을 만들고 그것들을 일련의 순서로 구성하는 작업은 무작위로 여러 개의 질문을 뽑아서 출연자들에게 질문하고, 그 중에서 앞서 말한 ‘진짜로’ 할 수 있는지의 기준에 맞는 다양한 행위들을 골라서 그것들을 흥미롭게 배치하는 과정이었다. 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재미있는 과정이었지만, 그 과정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도 공연의 핵심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소개 하겠다. 더 중요한 것은 출연자들이 각각의 행위를 무대에서 ‘진짜로’ 할 수 있게 하는 것, 혹은 ‘진짜로’하기 위해 한 가지 과제에 계속해서 집중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의도를 말하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결과적으로 공연이 어떤 형태였는지 묘사해보자면, 출연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던 것을, 혹은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을 반복해서 했다. 인사를 계속 하기도 하고, 노래의 한 구절을 반복해서 부르기도 하고, 발레 턴을 계속해서 연습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도 굳이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한 가지 과제를 지속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과제를 계속해서 하는 과정에서 출연자(연행자)는 그것을 ‘진짜로’하기 위해서 고군분투 했다. 때로는 고군분투하는 중에 그들의 과제가 다른 것으로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선택한 그 과제가 공연 전체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행자의 충동은 존중받았다. 그것은 바뀐 과제로서 그대로 수행되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지만 그 과제는 하는 사람의 충동에 의해서 달라지기도 하는 장면들이 자잘하게 모여서 이 공연을 채웠다. 때로는 각자의 과제를 수행하는 출연자들이 동시에 무대에 존재하면서 그 결합이 특정 공간, 시간에 대한 연상이나 특정 상황을 암시하는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러한 연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이 공연에서는 무엇인가를 진짜로 수행(performance)하는 것이 중요하지,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언제, 어떤 상황에서 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극히, 퍼포먼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객관적인 눈을 가지기는 힘든 입장에서 맘대로 써본 우리 공연의 이상적인 형태이다. 실제로는 매번의 공연이 모두 조금씩 달랐고, 이 조금씩 다른 것은 어제와 오늘 공연 사이에 큰 차이를 불러오기도 했다. 다른 형태의 공연에 대한 기록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 세 번의 공연을 촬영하여 편집한 동영상 링크를 첨부한다. (공연 동영상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5fW9GmPu-2k) 기왕에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으니 무엇인가를 ‘진짜로’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상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진짜로’가 진짜로 걸리는 단어다. ‘진짜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연기하지 않는, 최대한 ‘일상적’인 상태가 ‘진짜’ 인가? 다양한 주장이 있겠지만 묻어두고 우리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게 하는 것’ 혹은 ‘본연에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 겁나게 노력하는 것’을 ‘진짜로’ 하는 것으로 특정했다. 어쩌면, ‘진짜로’라기 보다는 ‘제대로’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광장에서 누군가를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목소리와 기교를 뽐낼 수도 있고, 노래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호소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는 후자가 ‘진짜로’ 사랑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사람이 콩쿨에 나가서 노래 실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연의 목적인 사랑 고백에 충실한 것이 진짜라는 것이다.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면 그 사람이 완전히 음치에 박치라고 해도, 그 광경은 기분 좋은 것, 감동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기분 좋은 광경’을 만들기를 바랐다. 어쩌면 조금은 무리한 기대일지도 모르겠지만 무대 위에서 우리가 최소한, 내가 하는 것의 본질을 알고 그 것으로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기를, 그리고 그 과정을 관객들이 ‘기분 좋게’ 바라봐 주는 상황, 그러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기를 바랐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 때, 그 시선이 없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내가 할 일에 계속해서 집중하는 것은 굉장히 도달하기 힘든 상태일 것이다. 그 상태는 수련을 하는 것과 비슷한 어떤 상태 같다. 비슷하긴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조금 더 장난기어린, 그래서 놀이에 가까운 어떤 것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 과제 자체는 변해도 괜찮은 어떤 것, 실패해도 괜찮은 어떤 것이지만 일단 과제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 신나게 놀 수 있는 어떤 것이기를 바랐다.



이러한 바람과 이상들 속에서 공연이 만들어졌고, 공연이 되었고, 이제는 끝났다. 사실 만드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우리가 한 것은 어쩌면 무대라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들 중 각자에게 가장 쉬운 것들이었다. 많은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특정한 것을 ‘제대로’ 혹은 ‘진짜로’ 하기를 요구받지만, 우리는 아무거나 ‘진짜로만’ 하면 되었으니까. 작업인원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작업의 다른 점은 숨을 구석이 없다는 것이랄까. 어차피 뭘 하든 겪게 될 불인데, 잘 비껴가는 게 아니라 불꽃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저 불 한가운데에 가면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우리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뭐가 있긴. 재가 된 내가 (혹은 나였었던 무엇인가가) 있겠지. 어떻긴. 개 뜨겁겠지. 내가 그 두려움만 벗어던진다면, 그래서 진짜 활활 타올라버린다면 공연은, 좋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흥미로울 것 같긴 하다.” 여기서 ‘뭘 하든 겪게 될 불’이라는 말을 나는 어떤 형태의 공연을 하든지 ‘진짜로’ 할 때 겪을 수밖에 없는 고군분투라고 해석했다. 나는 드라마가 있든, 없든, 뭐가 되었든 그 공연이, 그 공연에 출연하는 사람들이 활활 뜨겁게 타오르길 바란다. 겁나게 뜨겁게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기를 바란다. 겁나게 집중해서 자신의 과제를 하고 있는 누군가를 공연의 현장에서 보고 그 에너지를 느끼기를 원한다. 확실히 이런 것들은 앞서 말한 일반적인 의미의 드라마에 연관된 것은 아니다. 텍스트나 어떠한 의미를 위해 봉사하는, 그 의미나 이야기를 향해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요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타오르지 않아도 연극의 의미망은 구축될 수 있고, 관객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공연 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 드라마에 봉사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기억되기에 가치 있는 그러한 순간들을 보고 싶고 기억하고 싶다. drama-out 연재를 이러한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혹은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공연들에 대한 이야기를 쌓는 통로로 삼고자 한다. 비슷한 지점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과의 대화도 고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