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함스타
<세 자매> 연출 문삼화 공상집단 뚱딴지 2013/11/21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소극장 |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하고 노래하지 않고, 그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이 다소 불순하고 허무주의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허무의 발바닥 밑에, 밟혀서 단단해져버린 희망이 있다. 희망이 없다면 절망도 없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괴로운 것은 그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할 수도 없고 희망할 수도 없는 현실에서, 깊이 절망함에도 불구하고 깊이 희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의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체홉에서 허무주의를 읽지만, 그렇기에 나는 체홉에서 희망을 읽는다.
문삼화 연출의 <세 자매>가 좋았던 것은 절망하지만 계속 살아갈 수 밖에 없고 살아간다면 진심으로 희망할 수 밖에 없는 그저 그런 사람들의 삶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희곡사적인 체홉의 의의라든가 소위 대작의 부담이라든가 하는 허위 의식은 다 내려놓고, 어깨에 힘 쫙 빼고, 연극은 인물들의 희망과 절망의 서로 맞댄 살결을 무심한듯 세심하게 읽어낸다.
연극은 오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배우들의 연기 톤이 좀 달뜬 듯 했으나, 이내 괜찮아졌다. 할아범이 말귀를 못알아듣는 장면이라든가 뚜젠바흐의 외모를 비하하는 장면과 같이 소극적 웃음을 유발하는 포인트는 살리고, 짐짓 비극적 감정이 심각하게 부각될 수 있는 포인트는 다소 차분하게 눌러주었는데, 그 맛이 담백했다. 무대는 좀 후졌지만, 무대만 화려하고 번듯한 연극에 질릴만큼 질리던 차에, 차라리 그 후진 무대조차 나는 좋았다. 최고급 레스토랑의 화려하고 대단한 요리도, 맛집의 감칠맛 나는 솜씨도 아니지만, 그럭저럭한 집밥만큼 마음이 더워지는 것도 또 없으니.
<세 자매>의 인물들이 시간에 대해서 자꾸만 이야기하는 건 살아간다는 일이—시간을 견디는 일이 우리들의 삶을 자꾸 존재하는 것들보다는 부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와 시간의 문제에 관한 베르그손의 생각을 빌리자면, 인간은 타자의 현존을 동일자의 부재로 파악한다. A였던 것이 B가 되었을 때, 절대적인 현재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B가 있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사람들은 "A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세 자매에게 지금 여기는 ‘모스크바가 아닌 곳’이고, 베르쉬닌에게 지금 여기는 200년 뒤, 300년 뒤의 보다 행복하고 진보한 세상이 아닌 세상인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지금 여기의 자신을 견디기 어려운—대다수의 우리와 같은—사람들은 과거를 현재에 투영하고, 미래를 현재로 당겨쓰면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가혹함을 견딘다. (사랑에 홀딱 빠진 인물인 뚜젠바흐만이 미래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행복하고 충만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나이브한 뚜젠바흐는 나이브하게 죽는다.)
‘시간’의 모티프가 무척 중요한 작품이기에, 함께 본 선배는 의사선생 체부띠긴이 시계를 깨뜨리는 장면이 마뜨료쉬까로 대체된 것이 다소 불만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희곡에서 매우 상징성이 강한 장면을 별다른 강조 없이 흘려버린 데 대한 아쉬움에 한편으로는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못 하는 건 못 한다고 하는 게, 그게 사실은 제일 어려운 법이니까. (그리고 그게 어려워서 망하는 연극이 너무 많다.)
어렸을 땐 “난 커서 뭐가 될까”, 늘 궁금했다. 어떤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뭐 대단한 사람까지는 아니라도, 그래도 뭔가가 될 줄 알았다. 그리고 어느날 눈을 떠보니 어느새 나는 다 커서 이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이 되려고 컸구나,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지만 기대는 현저히 줄어든 세상의 모든 그저 그런 생에게 <세 자매>는 손을 내민다. 교훈도 없고 질질 짜는 감동도 긴박함도 없는 두시간 삼십분이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은, 산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울고 화내고 웃으며 살아내는 그저 그런 삶들이 애잔하고 좋아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