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최희범
2013년 11월 29일(금) 저녁 8시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연출 김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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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도로처럼 가로가 긴 장방형에 가운데 노란 중앙선이 표시되어 있다. 그 한 가운데에 약간은 흉물스럽기도 한 러닝머신이, 좌우 양 끝에는 스탠드 마이크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중년의 남자배우가 뭐라 중얼거리며 걸어 나와 러닝머신에 주목한다(정확히는 손전등으로 러닝머신을 비추며 한 참을 갈등하는 듯하다). 이내 러닝머신에 올라 뛰기 시작한다. 그의 ‘달리기’는 극의 중반부에 한 번 중단되고, 마지막에 그의 죽음과 함께 정지된다.
사실 윌리가 공연 내내 뛰는 것은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이미 입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알고서도 공연을 보러 간 것은 당연히 “뛴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뛸까?”가 궁금해서였다. 심지어 공연장 로비에 비치된 리플릿도 친절하게 많은 정보를 주고 있었다. “본 공연은 윌리가 죽음으로 달려가는 원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하여 마치 플래시백처럼 지나간 장면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윌리는 무대를 가로질러 놓여있는 러닝머신 위에서 러닝타임 내내 달리기를 하고, 그의 주위에서 가족들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며 등장해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다른 공연에서는 몇 천 원씩 주고 사서 봐야 하는 프로그램북 대신 무료 리플릿을 배치한 것은 원작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을 배려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리플릿에 적힌 말대로 ‘감각적 체험’을 기대하며 공연을 지켜보았다.
개념적으로는 재미있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윌리가 자살을 하기 위하여 차를 달리는 부분이 도로처럼 생긴 무대 한가운데 러닝머신을 달리는 배우를 통해 표상되었다. 차를 달리는 윌리에게 때로는 환경미화원의 모습으로, 교통순경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큰 형, 벤은 원작에서도 일상적으로 벤의 환영과 대화하던 윌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다른 인물들이 순수하게 기억 속의 환영처럼 등장한다면 벤은 그에게 있어서 현실과 환영의 사이에 반쯤 걸쳐있는 인물인 것이다. 또한 윌리의 러닝머신 주위를 빠른 속도로 달리는 배우들의 모습은 전체 무대가 차도이고 윌리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윌리가 달리고 있는 자동차는 그의 기억을 따라가면서 때로는 그가 홀로 죽음을 향해 달리는 쓸쓸한 자동차였다가, 때로는 온 가족의 운명을 태우고 희망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가 되기도 한다. 커보였던 러닝머신도 다른 배우들이 앞뒤양옆에 줄줄이 올라타면 그 무게가 버거워 보여, 희망에 찬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 무게를 지고 달려왔을 윌리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다른 인물들의 모습이 윌리 자신이 창조해낸 기억과 환영에 불과함에도 이 환영들은 윌리가 차를 달리는 그 순간에도 (그들 입을 통해 나오는 대사를 통해)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러닝머신과 윌리를 때리고 괴롭히는 행동들을 통해서) 그를 괴롭히고 압박하고 순간순간 절망을 향해서 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추진력으로 작용한다. 인물들은 윌리의 회상 속에서 그에게 차가운 눈빛만을 남기며 사라져간다. 윌리의 앞에서 연극을 하듯 과장된 그들의 연기 스타일은 윌리가 느끼는 타인들로부터의 소외, 이질적 세계에 속한 듯 고립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다못해 그의 기억 속 인물들은 넓은 무대를 누비고 걷고 뛰고 화내고 말하지만 정작 기억의 주체인 윌리는 러닝머신 레일 위에 갇혀 무작정 앞으로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체험적·감각적으로는, 적어도 나에게는 심심하거나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은 공연 이었다. 사실 롤러 블레이드를 타던 배우가 전선을 밟고 지나가면서 엠프를 쓰러뜨려 마이크가 작동하지 않던 몇 분이 가장 흥미로웠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이 헤프닝 외에 무대에서 내가 눈길을 줄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달리는 윌리, 그의 주변을 흐르는 기억들. 그러나 윌리를 보면 심심했고, 다른 인물들을 보면 혼란스러웠다.
러닝머신은 무대의 정 중앙에 위치했다. 크기가 작지 않았고 앞의 조명, 음향 도구들과 무리를 이루며 무대 전체의 무게 중심처럼 보였다. 그러나 윌리가 공연 내내 달릴 것임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눈 바로 앞에 보이는 달리는 배우의 이미지는 리플릿에 적혀있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터로 내몰려 쉼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우리들의 아버지”라는 의미 이상의 것을 나에게 주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달렸고, 비오듯 진짜 땀이 흘러내렸고, 실제로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에서 어떤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체험”을 하기는 어려웠다.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누군가가 열심히 뛰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나에게 감각적인 체험을 줄 수 있을까? 마라톤 중계에서 한 선수를 2시간 내내 보여준다면, 그 중계를 끝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 게다가 이 배우는 ‘그냥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연기하면서 달렸다. 이 배우의 표정 연기와 대사들이 사족처럼 느껴졌던 것은 나만의 감상인가? 어쩌면 이 지루함은 배우가 공연 내내 달릴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달릴까?”하는 배우의 육체적 고통에 대한 걱정 혹은 호기심과 함께 보았다면 다른 감상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미 무료로 배부된 리플릿이 이 정보를 모두에게 주고 있었다. 모두가 계속되는 달리기를 예상하는 상황에서 배우의 땀과 육체는 더 이상 신선한 충격 같은 감각적 자극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 고생이 무색하게 그의 이미지는 단순히 “달리는 아버지”를 표상하는 기호로 의미가 압축되어버렸다. 한 시간 동안 한 가지 의미를 반복 생산하는 기호가 무대의 한가운데, 너무도 큰 무게감으로 존재하는 것은 감각적 자극이 아니라 이런 저런 판단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윌리, 혹은 우리 아버지들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가?” 철저하게 윌리의 시각에서 재구성된 다른 인물들의 눈빛과 말투는 그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킬 법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연민을 갖도록 강요받는 것 같은 느낌에 불쾌함이 고개를 들었다. 다짜고짜 윌리의 자살 장면으로부터 시작된 공연에서 관객으로서의 감정은 서사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윌리라는 인물에 다가가지 못했기에,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불쾌하다고까지 여긴 이유는,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현대 사회 보통 아버지들의 일반적인 이미지들, 그들에 대한 일반적이고 관념적인 연민뿐인데, 그 이상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연민을 요구받고 있다는 부담스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우리네 아버지상이라는 얕은 의미를 위한 상징적 기호가 아니라, 어떤 의미라도 창조될 수 있는 감각적 체험을 기대했던 터라(그리고 제작진들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약간은 실망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공연 중반에 이러한 기대에 부응했던 순간도 한 번 있었다. 내내 달리던 윌리가 멈춰서고 시끄러운 음악도 멎고, 잠시 큰아들 비프와 윌리가 러닝머신에서 서로의 앞뒤에 서 있었다. 두 인물의 턱 끝에서 똑같이 리듬감 있게 똑똑 떨어지는 땀방울들. 조명은 어두웠지만, 그들의 땀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굴 속 종유석들에서 빛을 받으며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보듯이 정신없이 그 땀방울들을 바라보았다. 그 땀방울들은 배우들의, 서로의 분신과 같은 두 부자의 모든 것의 보여주고, 그야말로 감각적으로 느끼고 상상하게 하고 있었다. 내가 불러낸 말도 안 되는 종유석 이미지와 함께 수많은 다른 감정과 이미지들이 교차되는 순간이 그래도 한 순간은 존재했다. 이 땀방울들이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러한 순간을 만들어낸 것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순간을 창조하기 위하여 러닝머신을 무대 한 가운데에 대단한 볼거리마냥 전시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의문과도 함께.
다른 한 편으로 윌리 외의 인물들에게 눈길을 돌리면 정신없이 혼란스러운 작품이었다. 많은 인물들이 등퇴장을 반복하며 윌리를 타격한다. 시끄럽고 반복적인 전자 사운드의 배경 음악이 계속된다. 인물들은 마이크를 통해 증폭되고, 약간의 에코 효과가 가미된 음성으로 윌리와 대화하고, 윌리의 주변을 뛰어다니거나, 롤러 블레이드를 타며 무대를 누비고, 관객에게 말을 걸고, 미식축구를 하고... 그야말로 시각적, 청각적 과잉, 과속의 상태이다. 그런데 이런 과잉된 볼거리들 가운데서 관객으로서 나만의 독자적인 길을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길을 잃었던 것 같다. 과잉된 정보와 혼란스러움은 때로는 흥미롭지만, 과장된 혼란스러움 이면에 절제된 형식미가 존재할 때, 관객으로서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느끼며 작품에 집중하기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형식미는 나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들 가운데서 나만의 독자적인 감상의 길을 찾게 만든다. 이런 독자적인 감상과 함께 때로는 공연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감상 자체에 대한 의문에 휩싸이기도 하며 몰입과 객관화를 반복하는 그런 경험이 나에게는 흥미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 공연을 보면서는 과잉된 장면의 파편들 가운데서 나를 잡아끄는 어떠한 형식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지쳐버렸던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인지,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