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
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연출.작 / 이윤택
극단 / 국립극단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그 아들 정조의 이야기는 꽤 많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 <대왕의 길>에서는 임호가 뒤주 속에 갇혀 죽기까지의 사도세자를 연기했으며, 이서진이 분한 정조가 주인공인 <이산>에서는 사도세자 역으로 이창훈이 특별 출연하여 회상 장면에서만 잠깐씩 등장한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오만석이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출처: 지식백과) 아마도 광기에 둘러싸인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꽤나 자극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두 눈으로 똑똑히 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왕의 남모를 슬픔이 대중의 연민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리라.
사실 역사극은 이미 정해진 결말로 꾸며나가는 이야기이며, 반전의 요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최근 나의 관극 리스트에서 자주 제외되곤 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 포스터를 가득 채우는 김소희 배우의 얼굴, 포스터 지면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고,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역사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남성의 눈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던 운명을 지닌 한 여인의 눈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극장을 찾았다.
<혜경궁 홍씨>의 연극의 시간은 홍씨의 사유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옷깃을 풀어헤친 사도세자의 혼령은 홍씨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면서 살아생전 나누지 못한 부부간의 따뜻한 담화를 나눈다. 그러던 와중, 아버지 영조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그들의 시간은 홍씨가 어린 소녀이던 시절, 처음 입궁하던 그 때로 돌아간다. 아버지 영조께 드리는 아침 문안인사 한 마디에도 쩔쩔매는 열 살의 이선(사도세자, 장조), 그에 비해 영민하고 사리분별이 빠른 동갑내기 홍씨.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던 그 시절의 두 사람의 모습이 어딘가 안쓰러웠다.
시간은 다시 두 사람이 성인이 되고 훗날 정조가 되는 이산이 태어나는 그 때로 넘어간다.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 느낀 외로움과 애정결핍이 온 몸에 열꽃으로 번져 늘 답답함과 가려움증을 호소하던 사도세자는 여색을 즐기고 나인들을 살해하는 등 아버지의 분노를 사는 행동들을 일삼아 하면서 점점 더 광인의 모습에 가까워져 간다. 어떤 해석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미치광이로 기록된 것이 사실이 아니며 그는 당시 붕당 갈등의 희생자일 뿐이라고 한다. 그가 정말 미쳤는지, 미친 척 했는지, 아니면 단지 역사적 희생물일 뿐인지 진실은 알 길이 없으나, <혜경궁 홍씨>의 사도세자는 진실로 ‘미친 듯’해 보였다. 그리고 그 광기의 원인이 아버지의 메마른 사랑과 부족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이 개연성 있게 설명되었다. 같은 자식들이지만 호불호가 매우 분명했던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에게는 유난히 박하다. 연극은 그의 광기,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 개개인의 내적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늘 “외롭다”고 말하던 사도세자의 그 외로움은 아버지 영조가 그를 뒤주에 가두려 할 때 그의 “살려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는 처절하고 고독한 외침으로 더욱 격화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힐 때 그를 둘러싸는 인물들의 다양한 속내도 무대 위에서 드러난다. 노론의 영의정이 사도세자의 죽음의 필요성을 주창하고,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한 신하는 그 직위를 박탈당하고 궁에서 쫓겨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 누구 하나 나서서 사도세자를 옹호해 줄 사람이 없다. 아버지보다도 더 따르고 의지하던 홍씨의 아버지이자 장인인 홍봉한 또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사도세자의 친모인 선희궁 마저 안타까운 마음을 훔치고 울부짖으면서 아들의 죽음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오로지 어린 아들만이 할아버지 영조에게 선처를 빌면서 오열할 뿐이다. 이들은 하고자 하는 말을 하지 못한다. 사도세자에 대한 음모와 그의 광기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그의 죽음에 한 표를 던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차마 말하지 못한’ 답답한 속사정은 혼령으로 다시 무대 위로 등장한 그들의 입을 통해 비로소 전달되며, 그 사건이 있던 날, 살아서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서도 “누구도 내게 옳은 말을 해 주지 않았구나”라며 애통해하던 영조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치열했던 붕당간의 갈등 속에서 안정적인 정세를 유지하기 위해 강인하고 엄격한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있던 영조의 인간적인 면모가 처음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느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한 나라의 왕이기 이전에 아버지였던 영조의 속마음. 그도 외로웠구나.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홍씨는 어릴 때부터 몸에 땀이 차면 가려움증이 심해져 종종 잠을 못 이루곤 한다. 백발이 된 그녀는 모두가 떠난 후 방에 혼자 남아 가려움을 해소하려고 안간 힘을 다 쓴다. 벽에다 문질러도 보고 방바닥에 대고 온 몸을 흔들어도 보지만, 그 찌뿌둥한 가려움은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온 몸에 점점 더 땀이 차오르고 가려움은 심해져만 가는데, 혼자서는 어떻게 없앨 방법이 없다. 홍씨가 태어날 때부터 노년까지 함께해 온 그 가려움이야말로 그녀 옆에 평생 붙어 온 외로움이 아닐까. 딸로서, 언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한 여인이 감당해야만 했던 엄청난 무게들. 그리고 그녀가 맡아 온 이 수많은 역할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충돌과 갈등 속에서 버텨내야만 하는 운명. 그 모든 것들이 온 몸에 배겨서 가려움이라는 통증으로 남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 된다. 결국 그 가려움을 해소해 주는 것은 죽은 사도세자의 혼령이다. 백발이 된 홍씨에게 사도세자의 혼령이 나타나면서, 서로의 가려운 부분만을 긁어주며 서로의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되었던, 어떠한 고통도 예견하지 못했던 열 살의 두 사람이었던, 그 때의 모습 그대로를 다시 재현해 내고 있다.
홍씨의 기록인 <한중록>을 기반으로 쓰여진 이윤택 작 <혜경궁 홍씨>는 홍씨 한 인물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의 사상을 조명한다. 따라서 연극은 역사적 사실 혹은 사건이 아닌, 그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인물들’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다.
1700년대 조선. 그들은 모두 외로웠다. 친부에게 사랑을 못 받고 정치적 갈등의 소용돌이의 희생자가 된 이도, 지아비가 다른 여자와 합궁을 하는 것을 묵언할 수밖에 없었던 이도, 눈 앞에서 벌어지는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이도,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도, 모두 그렇게 진행되는 당시 역사의 흐름 앞에서 이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수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미 일어났던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절절했던 것은 그들의 외로움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생각 때문일까. 홍씨가 남긴 <한중록>은, 극중 그녀의 대사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들은 절대 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어난 일들을 모두 담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연극이 끝난 후 아직까지 혜경궁 홍씨의 잔상으로 남아 있는 김소희 배우의 얼굴이 계속해서 떠오르면서, 그녀가 차마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욱 궁금해진다.
약 3주 간 진행되는 공연이 전석 매진이라고 한다. 애초에 계획했던 극장 규모를 축소한 탓도 있겠지만 올해 국립극단의 마지막 공연인 만큼, 그리고 연희단거리패의 두 축이 참가하는 연극이니만큼, 관객들의 관심이 뜨거워진 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공연을 약 한 달 남짓 앞두고 공연장을 바꾼 탓인지 이 연극의 스케일은 극장의 그것을 넘어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홍씨가 머무르는 안채를 기준으로 회전하는 무대 구조는 대극장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구현될 법했으며, 많은 수의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물리적으로) 설 자리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모든 회차 매진으로 무대 양측에 보조석을 놓는 바람에 무대는 더욱 작아진 듯한 안타까움이 남는다.
<사견들>
- 중간 중간에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혜경궁 홍씨의 경상도 사투리에 깜짝 깜짝 놀란다. 인간적인 배우다. (그래서 더 좋다)
- 사도세자의 정직한 초콜릿 복근은 온 몸에 송이송이 붉게 핀 그의 피부병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리라.
- 모두가 귀신으로 등장하는 그 장면. 조선시대 배경의 <새벽의 황당한 저주>나 <월드워Z>를 보는 듯했다. 어린 배우들이 좀비 영화를 많이 봤나. 절도 있는 좀비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