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6일 금요일

극단 애인, 《손님》

by 에스티

<리어 왕> 4막에서 글로스터는 이제 그만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을 작정에 미치광이 톰에게 자신을 도버 해협으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한다. 사생아 아들이자 배다른 동생인 에드먼드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글로스터-에드거 부자는 황야에서 그렇게 다시 만난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도버 근처의 들판에 도착하는데, 두 눈을 잃은 자신을 언덕 위로 데려가 달라는 글로스터에게 에드거는 이미 언덕에 도착했다며 언덕 아래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해준다:
자, 바로 여기입니다. 가만히 서 계십시오.
저 밑을 내려다보니 무섭고 현기증이 납니다.
하늘 중간에 날고 있는 까마귀나 갈까마귀는
딱정벌레 크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쯤 밑에는
바다 바위 틈에 나는 미나리를 캐는 사람이 매달려 있는데 —
그것은 참 위험한 직업이군요! 제 생각으로는
그의 크기가 자기 머리밖에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바닷가를 거니는 어부들은 생쥐같이 보입니다.
저기에 닻을 내리고 있는 큰 배는 그 배에 달려 있는
작은 보트의 크기밖에 안 됩니다. 그 작은 보트는 또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부표와 같습니다. 이리저리로 밀리고 있는
수많은 자갈들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도 별로 크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아물거리어
거꾸로 굴러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리어 왕>, 4막 6장, 이경식 역)

이 순간 무대는 가상의 들판이었다가 높은 언덕 위가 된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글로스터는 그 말을 믿고 몸을 던지지만 실체없는 절벽은 그의 생명을 가져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아들인지도 모르는 사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열 개의 돛대를 이어 맨 것보다 높은 절벽에서 곤두박질해 떨어졌지만 기적같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났다고.
상상력이 제대로 발동된다면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엄청난 장면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시한 장면에 불과할 것이다. 나에겐 이 장면이 약간은 마술과도 같이 느껴진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개막한 극단 애인의 다섯 번째 작품 <손님> (윤정환 작/연출, 대학로 달빛극장)을 보면서도 이 장면이 다시 생각났다.



2013.12.05~15, 대학로 달빛극장 


극단 애인(cafe.daum.net/loveaplay)은 2007년에 시작한 ‘장애인’ 극단이다. 이 한마디만 들어도 극단의 이름이 왜 ‘애인’인지 알 것만 같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에게 늘 따라붙는 말의 첫글자를 떼어버린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장애(障礙)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사랑(愛)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들은 길게 사랑하는(長愛) 사람들이 된다. 물론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연극에 대한 사랑이기도 할 것이다.

지난 겨울 베를린에 머문 덕분에 나는 말로만 듣던 베를린 영화제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홍상수 감독의 경쟁 부문 초청이 주된 관심사였지만, 2013년 베를리날레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조금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2012년 런던 패럴림픽을 다룬 두 편의 영화가 베를리날레 스페셜 섹션에 초대되었는데, 나와 내 아내는 두 작품 모두를 보는 행운을 얻었다. 두 영화의 관점은 조금 달랐다. 먼저 본 Michael Hammon 감독의 GOLD – Du kannst mehr als Du Denkst (GOLD – You Can Do more than You think) 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금메달을 목표로한 세 선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등장한 세 선수는 운동량과 연습량에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이 감히 '핸디캡'이란 단어로 그들을 지칭할 수 없을 만큼의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었다. 반면 그 자신이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부작용에 의한 기형아로 태어난 Niko von Glasow 감독은 Mein Weg nach Olympia (My Way To Olympia) 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차마 하기 어려운 질문을 거침없이 던진다. (오, 그 유머와 능글능글함이란!) 질문의 요점은 “당신이 이렇게 힘들게 훈련해서 패럴림픽에 출전해서 증명하고자 하는 게 뭐냐, 이거 다 당신의 장애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비장애인 감독이라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무서워 결코 하지 못할 질문을 니코는 거침없이 던지는데, 그는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선수들을 자극하고 단련시켰다.

6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포스터,
잘 보면 팔이 하나만 있는 곰이 있다. 

GOLD

Mein Weg nach Olympia

이 두 영화를 보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우선 우리나라에서는 패럴림픽은 중계조차 제대로 되지 않지만, 패럴림픽은, 그리고 여기 출전한 장애인 선수들을 다룬 영화는, 결코 장애인들만을 위한 볼거리가 아니라는 너무나 뻔한 사실이었다. 또한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을 동정이나 무관심이라는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지만, 그들이 관심가지지 않거나 관심의 채널을 연민에다 맞추는 것은 어쩌면 멀쩡한 몸뚱이로 오늘 하루를 대충 산 자신의 본모습을 직시하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니코의 영화에서는 상대 선수로 한국 대표선수가 간간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그리고 부끄럽게도,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선수는 하나도 없었다.

연극은 올림픽과 패럴림픽이 구분되듯이 다른 리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연극이라는 영역에서는 비장애인들이 장애인 배우를 따라가지 못하는 지점이 생기기도 한다. 실제로 애인은 지난 여름에 밀양연극제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로 대상, 연기상(강희철, 백우람) 및 연출상(이연주)를 받았다. 연극을 보는 행위 절반 이상이 배우의 몸에 대한 탐닉이라 할 때, 그 자체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들의 몸은 연극에서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된다. 비장애인이라면 이러한 몸의 수행성(performativity)은 아브라모비치가 했던 것처럼 면도칼로 자기 배에 별을 그릴 때에나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이번 공연에서 장애인 배우들과 함께 출연한 비장애인 배우들은 어려움이 컸으리라. 특히 시각장애인 연기를 충분히 잘 해냈지만, 이같이 특별한 상황에서는 장애 ‘연기’의 한계를 볼 수밖에 없었을 김화영 배우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손님>의 무대


극 초반에 이루어지는 형제의 대화는 베란다로 생각되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형은 동생보다 많은 것을 경험했고 알고 있다. 한번도 달려본 적 없는 동생은 형에게 묻는다. 뛰면 뭐가 좋으냐고. 형은 대답한다. 뛰면 바람을 느낄 수 있다고. 이 대화는 점점 발전해서 베란다 난간에서 뛰어 내리면 바람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데까지 나간다. 물론 119에 전화를 해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치밀함도 보여준다. 하지만 문제는 뛰어 내리기 전에, 그리고 119에 신고하기 전에 베란다 난간에 서 있어야 하는데, 동생은 그걸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야기를 그쯤에서 접고 말았지만, 내게는 꽤 여운이 오래 남았다. 무대 앞에 설치된 난간은 1미터 남짓 높이의 목재 구조물이었다. 그들이 기대고 있던 난간 너머에는 바로 관객들이 앉아 있었다. 마치 에드거와 글로스터가 서있던 들판처럼 난간 바깥은 그저 평평한 극장 바닥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소방서에서 가져올 대형 쿠션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별로 높지 않은 그 난간에 오르길 포기하는 그 순간 그곳이 마치 벼랑처럼 느껴졌다. 에드거가 “이 세상 모든 것을 받는다고 해도 두 다리를 위로 올리지 않겠다”던 그 절벽 같은 것 말이다.

GOLD – Du kannst mehr als Du Denkst 소개 자료 (독일어, 영어)
https://www.berlinale.de/external/de/filmarchiv/doku_pdf/20132993.pdf
Mein Weg nach Olympia 소개 자료 (독일어, 영어)
https://www.berlinale.de/external/de/filmarchiv/doku_pdf/20132556.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