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1일 목요일

선택의 문 앞에 서서 - 바냐아저씨

 by 김재영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에 대하여

 연극의 마지막 장면. 바냐와 소냐는 무대 중앙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 둘은 꽤 오랫동안 침묵한 상태로 타자를 두들기거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 자신들의 일에 무척 몰두해 있는 것 같다. 무대 왼편에는 유모인 마리나가 늘 그렇듯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뜨개질을 한다. 무대 뒤로 의사 아스트로프가 그들의 모습이 생경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퇴장한다.

 연극은 그렇게 끝난다. 1막에서 바냐가 얘기하듯이 그들은 예전의 규칙적인 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돌아간다는 것,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것.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시인과 촌장의 ‘풍경’이라는 노래를 떠올려보자.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당신은 이 가사에 동의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둘째 치더라도,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애초에 ‘제자리’라는 것이 정해져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곳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다’는 시도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좌표축 위에 누군가의 ‘제자리’를 일방적으로 설정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곳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당췌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단, 한 가지 완전하지는 않지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이 ‘믿음’은 일종의 ‘체념’ 상태를 동반한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며, 도리를 깨닫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사람은 그가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무대 뒤로 퇴장하다가 멈춰서서 일에 몰두한 바냐와 소냐를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스트로프의 시선을 생각해 보라. 바냐와 소냐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이 예전의 그들의 모습과 전혀 닮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체념’의 상태가 희망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삶을 지속하게 하는 ‘의지’가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냐가 일을 해야 한다고 다짐할 때, 그의 다짐은 지난 25년간 그가 일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 이를 테면 세레브랴코프에 대한 기대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무대 위의 문

 무대는 간결하다. 무대 뒤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무대 왼편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뒷편 오른쪽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다. 그리고 방의 오른편에는 문이라기 보다는 아치형 입구에 가까운 출입구가 있다. 1막에서 4막으로 무대 위 장소가 바뀌면서 다른 무대 소품들은 조금씩 그 위치와 형태를 달리 하지만, 오른편 아치형 입구만은 변치 않고 남아서 무대를 지키고 있다. 문은 입구 안쪽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관객은 문을 볼 수 없고 입구로 들어가고 나오는 인물들만을 볼 수 있다. 이 입구의 바깥 쪽에 설치된 조명은 인물이 입구를 통과할 때마다 긴 그림자를 입구의 벽면에 드리운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입구를 통해 무대 밖에서 안으로 등장할 때, 그의 모습보다 그림자가 입구 벽면을 따라 먼저 등장하고, 등장인물이 퇴장할 때에는 인물이 사라지고 난 후, 그림자가 입구 벽면에 더 오랫동안 남아있다가 사라진다. 총 시간으로 따지면 인물보다 그림자가 더 오랫동안 무대 위에 존재하는 셈이다. 누군가 떠난 자리에는 그가 남긴 말이 잔향처럼 남고, 그의 그림자는 육체보다 오랫동안 무대 위에 자국을 남긴다.

 문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이자, 구분짓는 차단막이기도 하다. 등장인물들은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입구를 향해 걸어가다가도 문 앞에 멈춰서서 다시 무대를 돌아본다. 엘레나는 아스트로프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문으로 가다가 돌아서기를 반복한다. 그녀는 문을 박차고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 할 것임을 안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문 앞에서 나가기를 주저한다.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세레브랴코프와 엘레나는 애초에 문을 열고 이쪽 세계로 온 사람들이었지만, 결국에는 문밖으로 다시 나간다. 바냐와 소냐는 문을 닫고 이쪽 세계에 여전히 속해 있다. 문은 사람들을 이어주고 한 곳으로 모아주지만, 종국에는 사람들은 떠나거나 남거나, 나가거나 말거나의 선택에서 문을 사이에 두고 단절된다.


무대에는 바깥으로 향하는 문이 있다.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마지막 4막에서 바냐의 침실이자 영지를 관리하는 사무실의 한 쪽 벽에는 아프리카 지도가 걸려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낡은 지도이지만, 세레브랴코프와 엘레나가 그 곳을 떠나고 난 후, 아스트로프는 비로소 그 지도를 발견한다. “아마도 저 곳은 무척 덥겠지.” 아프리카는 거의 모든 면에서 러시아와 정반대 지점에 있다. 러시아의 겨울은 아프리카의 여름이다. 러시아에 있는 아스트로프의 숲은 아프리카의 그것과 전혀 다르게 생겼을 것이다.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과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은 외모와 문화, 사고 방식 등 모든 면에서 판이하게 다르다. 아스트로프가 엘레나와 헤어지고 나서야 벽에 걸린 아프리카 지도를 발견했다는 것은, 문의 안쪽과 바깥의 거리감이 러시아와 아프리카의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냐에게 역시 문의 안과 밖의 거리감은 그토록 멀게 느껴진다. 그는 그가 문의 바깥에 있었다면 엘레나와 결혼해서 지금의 세레브랴코프처럼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를 하지만 그는 문의 안쪽에 남겨져 있다. 그들에게 문은 그토록 열고 나가기 어려운 것이다.

선택의 문 앞에 서서 

 그래서? 아스트로프의 말처럼 그들보다 100년 뒤에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문을 박차고 나가지 못한 그들을 경멸하면서 우리 스스로 행복해질 방법을 찾았는가? 연극이라는 하나의 세계가 끝을 맺고 나서도 덩그라니 무대 위에 남아있는 육중한 문처럼 여전히 나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남아있다.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어차피 제자리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닥쳐올 일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모를 바에는 어느 쪽이 됐든 그저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견디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이 행복한 것이라면 행복한 채로, 절망적인 것이라면 체념의 상태에서 그저 버텨야 한다. 체념은 또 다른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