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다소 감정적인, 또는 개인적인 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0월은 5편, 11월은 4편의 연극을 예매했다. 한정된 시간과 돈을 고려해 고른 작품들이었다. 극장에 가는 것은 내게 공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즐거운 “놀이”이기 때문에 꽤 고심해서 작품을 고르게 된다. 그런데, 11월에 예약한 첫 공연에 나는 가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일정에 피곤했고, 방바닥은 알맞게 뜨끈했으며, 곧 무한도전(자유로 가요제 마지막 편 – 완성된 노래와 그들의 퍼포먼스가 너무 궁금했다)이 할 시간이었다. 시간을 흘끔거리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앉았다 일어섰다 했지만 결국 나는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가 보러 가지 않았던 작품은, 막을 내렸다.
왜, 돈을 내고, 작품을 예매하고도, 바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극장에 가지 않았나. 여러 모로,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누구를 향한 미안한 마음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너무 피곤했다.
2013년 10월 26일, 미셸 비나베르 작, 류주연 연출, 극단 백수광부, 선돌극장 |
<니나>는 세바스티앙과 샤를르라는 두 형제와 니나의 이상한 동거 이야기이다. 세바스티앙과 샤를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엄마가 해주던 음식을 그대로 해 먹고, 우중충한 집에서 사이 좋게 살고 있다. 형 세바스티앙은 세계 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공장 노동자이다.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을 그대로 요리할 줄 알고, 다소 고지식하며,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동생 샤를르는 미용사로, 사회문제나, 세계 정세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 둘은 왠지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샤를르는 미용실에서 함께 일하는 니나를 집으로 데려 온다. 여기서 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던, 고지식한 형과 자유롭게(아무렇게나?) 사는 니나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필연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이를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려는 형을 동생 샤를르가 아니라 니나가 적극적으로 붙잡게 되는데, 이때부터 니나는 샤를르의 애인이 아니라, 아주 이상한, 그런 존재가 된다. 니나는 우중충한 인테리어를 손 보고, 욕조를 들인다. 두 형제는 니나 때문에 바뀌기 시작하는데, 좋게 말하자면, 비로소 죽은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세바스티앙과 샤를르는 니나를 새로운 어머니로 여기게 되는 것 같다. 두 사람만으로는 잘 이루어 지지 않았던 대화가 니나를 통했을 때, 이루어 진다. 또 니나는 형제들의 옷을 벗겨 주고 씻겨 준다. 아니, 니나는 형의 옷을 벗겨 준다. 샤를르는 혼자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 간다. 나이가 지긋한 두 형제는 아이처럼 한 욕조에 들어가 같이 씻는다(1열 가장 가운데 앉아 있다가 설마했던 누드를 목격한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동생의 탈의 장면은 보지 않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불평했다, 꼭 전부 벗어야 합니까, 라고). 그들은 죽은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나와 다르게 살게 되지만, 니나라는 어린 새 엄마를 가진 그들은, 이상하게 아이처럼 행동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니나> 공연 사진 보기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샤를르는 자신의 애인이었던 니나가 형을 돌보고, 형과 자신을 똑깥이 대하는 것(예를 들면, 니나는 두 형제에게 똑같이 비쥬를 요구하고, 한 침대에서 두 형제 사이에서 잔다.)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는다. 니나가 형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질투를 느끼기는 하지만, 샤를르가 보여주는 감정은, 어머니의 사랑을 두고 질투하는 동생의 그것과 다르다고 하기 어렵다. 급기야 니나가 새 애인을 사귀어 두 형제의 집에서 나갈 때에도 샤를르는 니나를 그냥 보내준다.
이 기묘한 이야기가 왜, 사회극인걸까, 세바스티앙이 털어 놓는 공장 노동자이자, 관리자로서의 어려움, 하루 아침에 미용실에서 쫓겨나 쉽게 재취업하기 힘든 샤를르의 주정에서 사회의 문제는 드러난다. 두 형제의 상황, 두 형제의 대사는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 노동 현실과 연결해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나아가 백수광부는 “직장의 불합리에 대해 문제 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두 형제”와 니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피고용인의 위태한 삶을 세밀하게 보여준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굳이 이 작품을 사회극이라 부르기에는 니나와 두 형제의 기묘한 관계가 훨씬 중요하게 다루어 진다. 관객들도 이 셋의 관계를 납득하고 따라가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 같다. “위태로운 피고용인”인 그들에게 니나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위태로운 피 고용인의 삶의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극단의 소개도, 사실 관극 당시에는 느끼기 어려웠다. 직장에서 해고되는 노동자가 등장한다고, 등장 인물이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 한다고 해서, 이것을 “세밀한 묘사” 또는 사회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원 희곡의 문제인지, 번역하면서 발생한 문제인지, 그것도 아니면 연출의 문제인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이상한 인물을, 이상하게 연기하는 니나는, 그 자신에게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다. 70여분 동안, 딱 한 번 감탄했는데, 두 형제가 빈 접시를 앞에 두고 실감나게 먹는 모습을 보여 준 장면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새>를 보았다. <새>는 아리스토파네스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허공에 세운 유토피아를 풍자한 희극이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작품은 재미가 없었다, 전혀. 1시간 30분 동안, 웃을 수 있는 기회는 몇 번 없다. “이번 기획을 단서로 고증 공연, 재창작 희극공연, 비극으로 전환하는 공연 등으로 발전시키면 좋(프로그램 6쪽)”겠다고 밝힌 작가의 의도때문인지, “모순된 현실이 아니라 거기서 살면서 견뎌내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연출의 의도때문인지 모르겠다. <새>의 줄거리는 다소 황당하고 허술하기도 한다. “부드럽게 감싸주는 포근하고 쾌적한 도시”를 찾던 피스와 에우는 지갑 없이도 살 수 있는 새들과 함께 살겠다고 한다. 새들의 나라에서 살게 된 피스는 신들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중개하는 새들의 도시(구름뻐꾹나라)를 건설하자고 새들을 설득하고, 도시를 세워 통행료를 받으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 인간들에게는 폭력적으로 대하고, 신들에게는 원하는 것을 얻어 낸다. 유토피아를 찾아 왔던 피스는 구름뻐꾹나라의 왕이 되고, 피스의 횡포에 에우는 이 도시를 떠 난다. 이 도시는 결국, 그들이 이전에 살던 도시와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분명 이 작품의 중요한 메시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희극으로 썼던, 아리스토파네스의 의도는 너무 깊숙히 감추어 져 버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끔찍하기에, 피스의 말에 속아 넘어가는 새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도시가 완성되는 과정에 웃을 수 없었던 것인가? 난봉꾼 타조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면, 90분 내내 웃을 기회가 한 번도 없었을지 모른다. 희극을 보러 갔는데, 웃을 수가 없다니. 정말 기운이 쏙 빠진다(이와 별개로, 무대는 정말 좋았다. 무대에 대한 칭찬은 쉽게 찾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아쉬운 마음에 사진 한 장을 첨부한다).
연달아 심각한 두 작품을 보고, “현대 중산층 삶의 욕망과 내부적 갈등과 고립을 ‘감금과 감시’라는 설정으로 타자화된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는 <비상사태>를 보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길고 장황하게 불평을 늘어 놓았다(이런 불평의 글을 읽어 주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금 더 재미있게 썼으면 좋았을 걸, 죄송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사실 하나다. 연극을 보면서 웃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무겁고 어둡게, 심각하게, 이해하기 어렵게만 연극을 만들면, 극장에 가기 힘들다. 연극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연대와 깨달음, 그리고 변화는 관객이 찾아 줄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