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6일 수요일

우리가 노래하는 당신의 비극을 목격하라 : 음악극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by 이우정

입장하는 관객은 무대로 오른다. 공연시간이 다 되어 채워져 있어야 할 관객석에는 희미한 조명만이 흐른다. 한 가운데 놓인 원형(圓形)을 둘러 내리꽂는 시선으로 차곡히 앉으면 아무 것도, 아무도 아닌 것처럼 무리가 줄지어 등장한다. 그리고 빛으로 끊어내던 시간의 경계 따위는 없이 코러스의 입으로부터 바람소리가 찾아든다. 언제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 ‘무대 위 같은 공간, 우리 모두 함께’의 낯선 경험을 주는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의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리스 비극의 대표작이며 심리학적 용어로도 빈번하게 회자되는 오이디푸스의 이름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적어도 요 몇 년간의 공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름 있는 연출가에 의해서 과감한 시도로 제작되었던 적도, 희랍극 페스티벌로도, 기본으로 돌아가는 극적인 요소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오이디푸스인가.’라는 물음에 서재형 연출의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는 다시 한 번의 관람 횟수를 늘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준다. 그의 시도는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형식에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고대 그리스 비극은 제의적인 의식 속에 극적인 요소를 반영하며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극이 단순히 오락적인 대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의식적인 요소를 반영하는 것에는 원초적이고 깊숙한 감정을 흔들 수 있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것은 노래와 춤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의 일부로 포함되는 이것들을 담당한 이들이 바로 ‘코러스’이다. ‘코러스’는 그리스의 원형극장 앞쪽에 ‘오케스트라’라고 불리는 원형의 공간에서 극 중간 중간에 노래와 춤을 이어나갔다. 이들의 연행은 때로는 극중의 인물이기도 하고 극의 해설자이기도 하며 모순적이게도 극의 관람자이기도 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를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로 가져오면서 연출가 서재형은 이러한 ‘코러스’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우는 형식을 차용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기존의 극과는 달리 특정하게 이름 지워진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으며, 흐르는 물처럼, 스쳐가는 바람처럼 ‘코러스’들은 그들이 들려주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으로 분했다 사라진다. ‘코러스’는 이오카스테 왕비였다가 테레시아스의 까마귀 떼가 된다. 발이 부은 갓난 아이였다가 라이오스 왕이 되기도 한다. 보이게 하는 듯 보이지 않게 되는 인물들을 형상화함으로써 ‘코러스’를 통해 진행되는 이 극을 특별하게 만든다. 음향효과와 노래, 소도구들 역시 모두 ‘코러스’들의 손과 입으로부터 비롯된다. 오찬우 배우의 바람 소리. 책장을 넘기는 것 같은 타이밍의 소리. 신에게 계시를 받는 것 같은 소리. 누군가가 함께,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것 같은 소리. 아기소리. 합창. 독창. 나레이션. 군무. 이 모두가 그들이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러스’에 방점이 찍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단순히 고대 비극에 활용되었던 ‘코러스’ 집단을 현대극에 형식으로 되살려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그 경계를 넓혀둔다. 연행하고 있는 ‘코러스’를 중심으로, ‘확장된 코러스’의 역할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바로 관객이 그 대상이다. 극 중에서 ‘코러스’들은 배우일 뿐만 아니라 종종 관조적인 관객의 역할을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동시에 흐르는 이야기를 원형의 바깥에서 관조적으로 바라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 같은 ‘코러스’의 모습은 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 관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렇게 물리적으로나 상황적으로 근접한 관객은 코러스와 섞여 이 이야기의 동일한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코러스’의 시공간이 관객에게까지 투영, 확장되는 영리함이 이 새로운 ‘코러스’ 형식에게는 있는 것이다. 무대 연출 역시 이러한 효과를 도와 활용된다. 비극적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내내 단 한 번도 암전되지 않는 무대는 관객을 상황의 목격자로 몰고 가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조명을 켜고 끄는 것이 사라짐으로 해서 시공간이 단절되지 않았다는 확신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단순히 들을 뿐’ 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코러스’의 시공간은 확장되어 관객에게 목격자로서의 지위를 자연스럽게 주는 것이다. ‘코러스’와 유사성을 느끼면서, 관객은 마지막 장면까지 오이디푸스의 여정을 목격한다. 그의 길을 따라서 고개를 돌리면 전체 3층의 무대가 되어버린 객석을 마주한다. 익숙한 객석에는 곳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형체 없는 운명과 신들이 조명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목격하는 동시에 목격당하는 순간, 관객은 목격자에서 주인공으로 전이되는 또 한 번의 역할 변화를 경험한다. 오롯이 극에 녹아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흥미로운 경험의 매개체가 이 극에서 부각되고 있는 ‘코러스’임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는 것이다. 목격자에서 주인공으로 전이시키는 것. 그래서 진정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의 고통을 머리가 아닌 온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리스 비극을 풀어가는 새로운 형식이 가져온 미덕인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지금까지 그들의 울림은 소리 없이 묻는다.
보고 있지 않았는가. 그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를,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 역시 비극적 인생의 삼거리에 서 있지 않은가.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공연 영상 맛보기
http://youtu.be/UkeE5Wc4fQ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