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에 대하여
연극의 마지막 장면. 바냐와 소냐는 무대 중앙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 둘은 꽤 오랫동안 침묵한 상태로 타자를 두들기거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 자신들의 일에 무척 몰두해 있는 것 같다. 무대 왼편에는 유모인 마리나가 늘 그렇듯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뜨개질을 한다. 무대 뒤로 의사 아스트로프가 그들의 모습이 생경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퇴장한다.연극은 그렇게 끝난다. 1막에서 바냐가 얘기하듯이 그들은 예전의 규칙적인 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돌아간다는 것,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것.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시인과 촌장의 ‘풍경’이라는 노래를 떠올려보자.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당신은 이 가사에 동의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둘째 치더라도,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애초에 ‘제자리’라는 것이 정해져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곳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다’는 시도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좌표축 위에 누군가의 ‘제자리’를 일방적으로 설정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곳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당췌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단, 한 가지 완전하지는 않지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이 ‘믿음’은 일종의 ‘체념’ 상태를 동반한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며, 도리를 깨닫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사람은 그가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무대 뒤로 퇴장하다가 멈춰서서 일에 몰두한 바냐와 소냐를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스트로프의 시선을 생각해 보라. 바냐와 소냐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이 예전의 그들의 모습과 전혀 닮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