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8일 화요일

웃기기 참 힘들겠지만, 웃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 작, <구름> , 남인우 연출, 남인우, 김민승 공동 극본,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by 산책

화창한 휴일 오후, 보조석까지 놓인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좋은 휴일에 아리스토파네스를 보러 왔을까, 조금 의아했다. <구름>은 2500년 전의, 그리스 희극인데다가(작가의 말 처럼 “비극도 아니고 희극”), 전작인 <개구리>는 이런 저런 말도 참 많았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공연은 쉽게 권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티켓이라도 선물해 주면 모를까, 도대체 누구에게 자기 돈 내고 이런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해야 할 지, 참 쉽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날이 좋은 휴일 오후, 애써 햇빛을 즐기며 극장 마당에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이 온다. 아니,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렇게 유명한가? 이 사람들은 다 자기 돈 내고 스스로 극장을 찾은 유료 관객들인가? 그러는 나는 여기 왜, 혼자 앉아 있는 건가?

이런 질문들을 마음 속으로 던지다가 극장으로 들어가서 불쑥 코러스 장을 맞이 했다. 지난 작품에서는 오이디푸스를 맡아 두 눈을 찔렀다는 코러스 장(선글라스를 끼고 나왔다.)은 희극을 공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냐고 푸념한 뒤, “어디 한 번 웃겨봐라”고 팔짱 딱 끼고 있지 말고 관객에게 자신이 낸 입장료만큼 스스로 웃으라고 요구한다.

“관객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내신 입장료만큼의 웃음을 스스로 웃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희극정신입니다. 관객의 자발적인 희극정신이 발휘될 때라야 비로소 세상은 하나가 되고 우리는 위대한 배우가 되고 이 작품은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활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돈 내고 희극을 보러 온 관객에게 스스로 웃으라니, 이 무슨 무책임한 말인가. (게다가 이건 사실 <병신 삼단 로봇>의 시작 장면과 비슷하지 않은가? <병신 삼단 로봇> 이 궁금하시다면http://pa-view.blogspot.kr/2013/08/301.html를 읽어 보세요.) 게다가 <구름>은 ‘웃기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낭비벽이 심한 아들 때문에 진 빚과 이자를 갚지 않기 위해 아버지가 아들을 소크라테스 학원으로 보내 가르친 궤변론 덕분에 빚쟁이들을 떼어내지만 아들에게 얻어맞고 후회하면서 학원에 불을 지른다(<구름> 프로그램 9쪽) ”는 전체 줄거리만 보면, 대체 관객들은 언제 웃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게 된다. 여기, 이 많은 관객들은 이 작품을 왜 보러 온 것일까? 구름을 보면서 스스로 웃을 수 있을까? 그래, 뒤의 물음은 내가 이 작품을 보러 오면서 가지고 온 질문이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웃는지 보면서, 2500년 전의 희극이 대체 어떻게 공연되는지 지켜봐야지. (그래서 노트도 펴고 결연하게 앉았지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하지만 코러스 장의 엄포와 달리, “너무나 많은 것을 준비한” 배우들때문에 이야기는 재미있게 진행된다. 배우들은 1인 다역은 물론이요, 악기도 연주해야 하고, 무대도 밀고 당겨야 한다. 그나마 일이 없을 때는 무대 가장자리에 앉아 맞장구도 치고, 아버지나 아들을 놀리는 코러스의 역할까지 해야 한다. 관객들은 이 바쁜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때문에 웃고,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춤 때문에 웃고, 누군가들을 떠올리게 해주는 성대 모사때문에 웃는다. 또 불쑥 불쑥 종북이나, 일베같은 단어들이 훅 치고 들어 오면 허를 찔린 듯이 웃고, “구름”신이 Cloud로 나타나(왠지 동기화를 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직렬 5기통춤(다소 유행이 지난 것 같기도 하지만)을 추는 모습이라니. 이 모든 것들은 공연 내내 키득 거리게 만든다. 아, 이 웃긴 장면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정말 아쉽다. 하지만 농담을 설명하면 전혀 웃길 수 없듯이, 웃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쉽게 짐작하시리라 생각한다(결국 코러스 장의 변명과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군요). 어쨋든 나는 열심히 웃었다. 한 번 웃음이 터지니, 동음 이의어를 활용한 시시한 농담에도 까르르 웃었다.

그러나, 순간 몇몇 사람만 크게 웃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웃다가 주변의 무거운 공기에 순간 어깨를 움츠리게 되는 그런 순간들. 그래서 헛기침을 흠흠 하고는 다시 심각하게 무대를 쳐다보게 되는 그런 순간들.

그도 그럴 것이, 소크라테스 학교에 가기 위해 내야 하는 4천 만원의 등록금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교수들의 자제분들은 소위 ‘사’자 들어가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최고의 교육은 돈을 잘 벌게 해주는 것라는 결론은 부인할 수 없이 무섭다. 기껏 교육시켜놨더니, 아버지를 때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아들의 모습에 아버지들은 소름끼치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또 정치인들이 풍자되는 장면에서는 과연 이래도 되는지, 속으로 걱정하거나, 반대로 기분 나쁜 관객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개인의 욕망과 두려움은 도마 위에 오르고,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마음을 꼬집힌 그런 기분도 든다. 무대 위에서 내 모습을,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으면서도 웃을 수 없는 애매모호한 기분이 되고 만 것이다.

노트를 펴 놓고 메모를 하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공연을 보고 있을 때는 좋았다. 군데 군데 숨어 있는, 또 대 놓고 웃으라는 유머 코드에 킥킥 거리며 아, 너무 웃겨. 연출이 너무 똑똑해. 할 때는 상쾌했다. 그런데 내가 사는 씁쓸한 현실을 여기서도 맞닥뜨리자니, 입맛이 깔깔하다. 소크라테스[1]를 비롯한 그리스 사람들의 배포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극장을 나선 후에 강력하게 남은 것은 “재미있다”는 느낌 뿐이다. 모든 것이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마는 마지막 장면처럼, 작품 안에서 언급된 많은 이야기들은 극장 문을 나서면서 사라졌다. 이야기의 뼈대가 된 교육 문제를 제외하고는, 풍자되고 희화화된 많은 이야기들은 일종의 말장난, 익살, 또는 재치로 느껴졌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 정도에서 멈추었기에, 별탈없이, 별말없이 공연이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1] 진짜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소크라테스는 만명이 넘는 관객들과 함께 자신을 희화화한 <구름>을 웃으면서 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