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여름의 조선이랬다. 성기웅이 각색한 체홉의 <갈매기>의 배경 말이다. 그런데 내 눈앞에 펼쳐진 무대에는 텔레비전, 컴퓨터 모니터가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다. 명백한 시대착오에 무심하기에 아무렇지 않고, 아무렇게 버려져 있기에 또 그러하다. 사실 이 전자 기계들은 무수한 신문지 더미와 부서진 가구, 주저 앉은 의자, 휠체어 등과 함께 무대에 나뒹굴고 있다. 이게 뭘까. 쓰나미가 지나간 것 같았다. 여기서 첫번째 질문이 생겼다: 후쿠시마 ‘재앙’ 이후 일본 연극은, 아니 타다상 자신은 어떻게 변했는가?
공연을 보면서 다른 질문이 생겼기에 연출과의 대화 시간에 이걸 질문하진 않았다. 작품과 동떨어진 얘기 같았고, 좀더 사적인 자리에서 물어봐야 할 질문 같았기 때문에. 그리고 나 자신이 그런 모임에서 한 번에 여러 개의 질문하는 사람들이 얄미워 보였기 때문에. 고맙게도 연출은 묻지 않았지만 그 무대가 바로 그 ‘쓰나미’에서 영감 받았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못한 질문에 답을 얻었다. <갈매기>의 무대라면 의례히 호수가 배경에 펼쳐지거나 뭔가 꿉꿉한 습기가 느껴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예를 들어 2007년에 러시아 연출가 카마 긴카스가 연출했던 <갈매기>에선 무대 주변에 물을 담았고, 배우들이 그 물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물 20톤을 썼다고 한다! http://avion.egloos.com/m/984050) 베를린 도이체스 테아터에서 작고한 위르겐 고쉬 연출의 Die Möwe에서는 극 초반에 호수에서 멱을 감고 돌아온 야코프 일행이 무대 위에서 젖은 옷을 훌러덩 벗더니 옷을 갈아 입는다 (http://www.deutschestheater.de/spielplan/premieren_repertoire_2013_2014/die_moewe/). 이 느닷없는 노출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 또한 물이다. 그런데 타다의 무대는 바싹 말라 있어서 오히려 결여된 물을 떠올린다. 그에게 쓰나미가 일종의 트라우마임을 짐작하게 하는 지점이다.
정작 내가 했던 질문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그간 타다의 작품에서는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번 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여전히 한국 아이돌의 노래가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작품의 중심에는 ‘무한 반복’되는 라벨의 <볼레로>가 있다. 그리고 배우들도 (시계 방향으로) 등장하고 퇴장하는 움직임을 계속한다. 이 반복의 계기를 체홉이나 성기웅의 텍스트에서 찾았는지, 아니면 또 다른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의 대답은 대략 이러했다: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며, CD와 그 외의 것도 많이 가지고 있다. 아이유의 음반은 일본어로도 발매되는데, 판매량이 적어 아쉽다. 그리고 아이돌 음악이 최근 양국을 대변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사용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곡할 때에는 텍스트나 장면의 연관성을 고려하고 있다. 예컨데 순임(니나)이 쓰카구치(뜨리고린)에게 빠져드는 장면에서 아이유의 노래를 사용한 것은 그 장면과 아이유가 가진 이미지가 겹친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태평양 전쟁 발발 무렵을 그리면서 2NE1의 <내가 제일 잘 나가>를 튼 것은 이 노래말이 당시 일본인의 심상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내가 반복으로 이해한 리듬에서 타다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시간의 흐름이었다고 한다. 시계 방향으로 계속 흘러가는 사람들, 그리고 무대 위에 놓여 있는 여러 시대의 유물들이 그런 생각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안그래도 반복적인) 라벨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흐름보다는 반복이 두드러져 보인다. 양쪽에서 바라보는 객석 사이로 배우들이 한쪽 방향으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계속함으로써 공연장은 마치 F1 레이싱 경기를 지켜보는 것과 비슷해진다. 이 쳇바퀴가 무대 안에 들어가는 정도에 맞춰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이 구도의 장점은 극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모습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이지만, 궤도 절반 이상이 무대 밖에 놓여 있음으로 인해 배우들의 잦은 등퇴장이 불가피하다. 이는 마치 잦은 암전처럼 극의 흐름을 끊어 놓을 수 있는 것처럼 리스크가 따른다. 그냥, 타다가 늘 그랬던 것처럼, 배우들이 열심히 뛰는 모습 전체를 관객들이 목격하게 하면 어떨까? 다시말해 객석 뒤편으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천천히 또는 빠르게 도는 과정에서 배우들의 땀과 강력한 소리가 극장에 채워지면 그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어떤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체홉의 인물들에 한국 남자, 한국 여자가 비쳐진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것이 각색의 힘이고 그 나름대로 문화적 가치가 충분한 일이기도 하지만, 체홉의 애독자로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갈매기>에는 연애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대체로 한쪽 방향으로만 되어 있어서 일종의 먹이사슬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스템에 따르면 코스쨔는 자기 머리에 총을 겨눌지언정 결코 니나에게 버럭 화낼 수 없으며, 니나는 뜨리고린에게, 뜨리고린은 다시 아르까지나에게 꼼짝할 수 없다. <갈매기>가 명목상 ‘코미디’인 것은 바로 이 인물간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고 살기 때문에 이게 코미디로 느껴지지 않는다!
체홉이 완벽히 만족스러운 건 드문 일이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각색된 데다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함께 쓰고 일본인 연출가가 연출하게 되면 관심은 결코 연극미학에만 있을 수 없다. 나만 해도 러시아 작가에 한국과 일본이 더해졌다는 이 삼각 구도만으로 이 극이 을미사변과 러일 전쟁이후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지워져 버린 역사의 반복처럼 비쳐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비판보다는 응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처럼 양국의 사이가 나빠져만 가고 있는 이 때 사이좋게 연극을 만드는 무리들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쓰나미의 여파는 우리도 모르는 곳까지 들어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