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은교> : 몸을 보다 / 몸을 읽다


by 백인경


영화 <은교>를 보게 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열일곱 소녀와 일흔 살 노시인의 사랑이 아니라, 나는 일흔 살의 박해일이 궁금했다. 거대한 광고판에서 마주친 노인 박해일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껍데기 같은 피부와 이글거리는 눈을 갖고 있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순수하게, 어떠한 상상도 기대도 없이 영화에 집중했던 것 같다. 슬프고 조금 불편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아렸다. 은교의 발가벗겨진 몸이, 서지우의 무기력한 런닝 셔츠가, 노인이 ‘되어버린’ 이적요의 불룩한 배가, 피고 지고 시들어가는 꽃송이처럼 스크린의 환영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손 내밀면 만져질 것처럼.




몸을 읽다. 


<은교>가 제목이지만 소설 속에서 은교는 다만 이적요, 서지우, 그리고 Q 변호사에게 관찰되고 묘사되어지는 대상으로 존재한다. 은교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독자는 세 남자의 눈을 통해서 가늠해 볼 수밖에 없다. 각자의 시선에 따라, 그들의 욕망에 따라 은교는 다르게 해석되고 그 어떤 것도 은교의 실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은교는 그 누구도 아니며, 또한 그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소설 속에 은교는 없다. 다만 대상화된 은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은교는 철저히 대상이 됨으로써 극의 중심에 놓인다. 모든 욕망과 갈등은 은교라는 대상을 통과하며 굴절되고 확산된다. 마치 프리즘 글라스처럼.  

무기재료학의 길을 버리고 문학의 길로 들어섰지만 재능이 부족한 탓에 스승이 써 준 소설로 작가가 된 서지우의 삶은 무기체와 같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자신의 소설을 홍보하고 강연과 인터뷰 등 꿈꾸던 생활을 하게되었지만 그럴수록 서지우는 자신이 누구인지 더욱 더 혼란스럽기만 하다. 속은 텅 비어있고 껍데기만 영위하는 생활. 그의 쌍꺼풀은 그러한 삶의 표상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서지우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지니고 나온 쌍꺼풀의 운명을 따라 살았다고 느낀다. 그의 쌍꺼풀은 단지 깊은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허랑하고 범박했다. (…) '쌍꺼풀'은 그리하여 육체에 깃든 그의 젊음을 시시각각 먹어치웠다. 그는 젊은 시절에도 '그놈의 쌍꺼풀' 때문에 이미 중년이거나 장년이었다. 평생 그는 허당을 짚고 걸어야 했다.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국민 시인 이적요의 삶 또한 그의 필명처럼 '고요하고 쓸쓸하다'. 그는 한 평생 스스로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자신을 기획하고 연출하며 살아왔다. 주체적으로 타인들에게 대상화되었지만 그 연출이 영민했던 만큼 자기 부정과 타인에 대한 냉소는 심해진다. 많은 것을 이루는 동안 그가 경험하며 소비했던 많은 세월들은 고스란히 그의 육신에 나이테로 새겨졌다. '오, 육체는 풀과 같은 것.'  은교의 스침으로 일순간 소생했던 그의 몸은 그러나 거울 앞에서는 다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시든 풀과 같을 뿐이다. 


몸을 보다. 


소설 한 권을 다 읽어야 조각 조각 맞춰지는 몸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관객에게 제시된다. 관객들은 김고은을 통해 은교를 만나고, 박해일을 이적요로 맞이하며, 카메라의 눈을 통해 그들의 관계를 본다. 본다는 것은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간의 관계를 설정한다. 오프닝에서 이적요는 전신 거울 앞에 우두커니 자신의 몸을 비춰본다. 이 상징적인 장면은 거울을 통해 주체를 인식하는 라캉의 거울 단계를 떠오르게 한다. 실제 서른 후반의 배우 박해일은 그렇게 노인이 되어 늙어버린 육체와 마주한다. 섬세하게 그려진 검버섯과 표정을 짓누르는 듯한 주름들 너머로 예의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의 눈빛과 목소리가 어렸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육체는 정신에 맞지 않는 불편한 옷, 말 그대로 껍데기에 불과해 보인다. 노인이 된 젊은 배우의 연기는 두꺼운 분장과 무거운 움직임으로 낯설고 부자연스러웠지만, 상상 속에서 허물을 벗듯 청년 박해일이 톡 튀어 나왔을 때 나는 아마도 진짜 이적요를 보았던 것 같다. 싱그러운 햇살 가득한 숲길에서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육체에서 해방된 파릇한 정신의 지속적인 운동의 이미지였다. 낡고 소멸되어 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어가는 나의 육체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부자연스럽다. 

'탐닉'에 초점을 맞췄다는 정지우 감독의 말처럼 카메라는 집요하게 은교의 몸을 훑는다. 소설 속에서 은교를 바라보던 세 남성의 시각은 카메라의 시선으로 축소된다. 카메라가 제시하는 시각적 이미지는 대체로 주인공의 시점으로 함축된다. 카메라가 훑는 은교의 몸은 노시인의 시선이 되고, 이는 쉽게 그의 욕망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은 앎의 과정이지만 시선에 포착되는 대상, 즉 은교의 육체는 물신적으로 밖에 파악되지 않는다. 라캉은 시각적 탐구가 상상적이고 파악 불가능한 것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결코 실제 대상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소녀의 몸은 이적요의 상상 안에서만 완전하다. 보는 몸과 보이는 몸. 그 봄과 봄의 시선 사이에서 관객들은 소설의 그것과는 다른 층위의 상상력을 동원한다. 우리가 보는 것이 진짜일까?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일까? 

이적요의 상상 속에서 발가 벗겨진 은교의 순수한 육체는 영화 속 현실에서 드러날 듯 감춰져 있다. 짧은 교복단 아래로 비치는 속살이나 품이 넓은 이적요의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몸은 드러냄을 지연함으로써 긴장을 고조시킨다. 이적요의 욕망, 그러므로 관객의 욕망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이러한 지연의 순간에서 고조된다. 소녀의 육체를 제시하는 관음증적 시선은 모든 관객을 공범자로 유도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쉬이 이적요의 슬픔과 욕망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소설에 비해 주체적 인물로 그려지는 영화 속 은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상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시선 없는 주체에게 남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육체일 뿐이다.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을 향한 관음증적 시선은 결국 그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인해 파국을 맞는다. 이적요가 사다리에 매달려서 본 은교의 몸은 더 이상 지연을 거부한, 완전히 드러난 몸이다. 그 순간 은교의 몸은 팩트가 되고 상상과 욕망이 개입할 수 있는 틈은 차단된다. 


보는 몸 / 읽는 몸 


우리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몸을 소유하고 있으며 몸을 통해 세계와 마주한다. 몸은 하나의 이미지이자 기호이기에 앞서 살아있고 감각하는 물질이다. 몸의 물질성은 해석하고 판단하는 차원에 앞서 우선 경험되지만, 언어와 영상으로 정교하게 해석된 몸은 그 물질성을 이미지 뒤로 감추어 버린다. 환영의 장막 뒤에서 독자와 관객들은 아름다운 몸의 이미지를 마음껏 상상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소유한다. 시적 이미지로 가득 찬 소설 <은교>와 육체의 이미지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영화 <은교>에서 몸이 추동시키는 욕망은 닮아있지만 그것이 갈등을 야기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이는 원작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하는 질문에 앞서 매체가 몸을 제시하는 고유한 방식에 대한 탐구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만약 <은교>가 배우와 관객의 육체적 현존을 전제하는 연극으로 각색된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잠깐 해 보았다.) 재미있는 지점은, 소설 <은교>에서의 몸은 단어들의 여백 사이로 마치 눈 앞에 보이는 듯 펼쳐지고, 영화 <은교>에서는 이미지 사이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은교>에 대한 나의 감상은 문장으로 몸을 보고(소설), 이미지로 몸을 읽어내는(영화) 지점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과거를 기록하는 역사의 문장과 오늘을 사는 생생한 삶의 문법 사이는 별과 별처럼 멀다. 편지에 담은 나의 이런저런, 역사성을 간직한 문장들은 너의 인생이 아닐 뿐더러 너로부터 아득하게 결절돼 있다. (…) 너와 나 사이 그 가파른 시간의 단층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별빛처럼 단번에 네 눈, 머리, 가슴에 나의 열일곱 시절을 박아넣어, 너의 온 정신을 적실 길이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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