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 연극 <푸르른 날에>와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본 혁명과 사랑.

by 백인경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의 분노와 절망이 페스트처럼 온 도시로 번져나간 곳에서 인간은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 세계와 함께 멸망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일어나든지. 1832년, ‘불행한 사람들’<Les Misérables>로 득시글거리는 파리 뒷골목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1980년,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란 민호와 정혜의 <푸르른 날에> 광주에 울려퍼진 계엄군의 총소리는 평화롭던 이들의 일상을 뒤흔든다. 한국에서 (이제서야) 초연된 빅토르 위고 원작의 뮤지컬 <레 미제라블>과 벌써 세 해째 뜨거운 5월을 보낸 정경진 작, 고선웅 연출의 연극 <푸르른 날에>는 각각 ‘1832년 파리 6월 항쟁(June Rebellion, Paris Uprising of 1832)’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날의 사건들은 이미 역사에 환원되었지만 그날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도 공명한다. 거기에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를 ‘혁명’이라는 특정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반항’, 즉 삶을 향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싶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굴어야 하는 것, 본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을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지키고 싶은 가치와 반짝거리는 진실들이 있기에, 행복에 대한 인간의 뜨거운 갈망과 이에 냉담한 세계 사이의 영원한 대립은 인간 실존이 가진 근본적인 상황이다 - 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부조리다. 부조리의 인간 상태를 통찰했던 알베르 카뮈는 이를 부정하거나 무기력하게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바라보고”, “끝까지 살게 하는 것으로써 삶에 주어진 부조리한 전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어떠한 도피도(신체적 자살) 마취제도(철학적 자살) 거부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반항적 삶에 의해 실천된다.




그렇다면 반항이란 무엇인가? “참을 수 없다고 판단되는 침해에 대한 절대적 거부”와 동시에 자신의 어떤 부분에 대한 확신과 전적인 긍정에 근거하여 “Yes”와 “No” 라고 말하는 것이다. 카뮈에 의하면 반항이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어딘가 옳다는 감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이다. 부조리를 직시하면서도 부조리함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반항적 인간>은 생이 가진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행복에의 갈망과 삶의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 여기를 열렬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아니, 한계를 알기에 오히려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지만 지금 당장 죽을 수 없다는 공통적 운명을 안고 있다. 냉담한 세계에 던져져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보편적 인간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운명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타인의 삶에 연대할 때, 비로소 나는 진정으로 존재하게 된다. 연대성은 반항적 운동에 근거하며, 반항은 이 연대성 안에서만 정당화 된다 -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카뮈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사랑에 근거한 반항이며, 반항은 특별한 사랑 없이는 수행될 수 없다.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연극 <푸르른 날에>는 민호와 정혜의 현재 시점으로부터 30년 전 ‘그날’ 이후 시간을 훑으며 박제된 역사 속에서 그들의 삶을 꺼내온다. 오민호에게 일관되게 나타나는 태도는 절대적 생명의 가치– 가장 기본적인 인간 조건인 -를 지키는 것이다. 위험한 투쟁에 목숨을 내건 제자들을 말리기 위해 그들을 따라 도청으로 들어간 민호는 어린 제자인 왕배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고 분노한 학생들은 왕배를 죽인 군인을 잡아와 똑같이 죽이려 하지만 민호는 학생들을 달래고 그를 돌려 보내준다. 결국 도청은 계엄군에 의해 점령되고 제자들이 죽어 나간 곳에서 민호는 살기 위해 항복한다. 생을 택한 그를 따르는 것은 생사를 넘나드는 가혹한 고문과 죽은 제자의 혼령들. 민호는 그가 도청에서 구해줬던 군인에 의해 목숨을 건지지만 고문 후유증과 정신이상으로 자신의 아이를 밴 정혜를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속세에서의 삶을 버리고 불가에 귀의한다. 그러나 형의 죽음과 자신의 딸 운화의 결혼으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 것 마저도 쉽지가 않다.

생명의 절대적 가치성으로 점철된 오민호의 삶은 살아남음으로써 고스란히 시대의 고통을 앓아야만 하는 아이러니를 겪는다. 그러나 그의 반항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잘 다가오지 않았기에 그저 시대의 희생양으로 그려진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푸르른 날에>를 보며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이 들었더라는 것을 감추지는 않겠다. 오민호가 비겁하게 느껴진 부분이 있다면 이는 살기 위해 항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선택의 그늘에 갇혀 진정으로 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기에는 오민호의 삶도 그들이 죽어간 그 때, 이미 스스로 살기를 그쳐버렸다.

그러나 연극은 자칫 통속적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다룬다. 위트있는 대사와 유머가 넘치는 과장된 화법은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게 하는데, 이로써 세계의 비극과 생의 환희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은 유지된다. 일사불란한 배우들의 움직임은 폭발하는 투쟁의 현장을 기록이 아닌 체감으로 전달한다. 항쟁의 공간 안의 개별자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그들의 투쟁을 비극의 역사가 아닌 의지의 역사로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등장한 80년대 록 음악(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과 김남주의 시(학살2)는 장면의 저항적 분위기를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다시 이 개별적 사건을 보편적 역사로 치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음악과 시를 알고 있는 우리들 역시 이미 그 정신으로부터 동떨어져있지 않다.
아마도 서로 믿고 사랑하는 배우들과 스텝들의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넌센스’이며 ‘세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하자’는 고선웅 연출의 말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이야기를 다르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이 여전히 연극이 가진 거부할 수 없는 힘이자 매력일 것이다.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푸르른 날에>가 특정 역사를 오민호라는 개인의 삶을 중심으로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반면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그 시절을 살아야 했던 개별적 주체들을 공시적 관점으로 보여준다. 빅토르 위고의 방대한 원작소설을 압축해 놓은 뮤지컬의 스토리는 빠르고 간결하게 전개되는데, 원작의 서사는 많은 부분 생략되고 대신 등장인물 그 자체에 방점이 찍힌다. 극의 진행은 사건의 전개에 따르기보다는 팡틴/장 발장/자베르, 그리고 코제트/마리우스/에포닌과 같은 인물들의 등퇴장을 중심으로 구분된다. <레 미제라블>의 인물들은 여느 뮤지컬들과는 달리 배역의 비중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아리아를 갖고 있다.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멜로디는 때로는 홀로, 때로는 함께 불리며 주요 장면들을 구성하는데, 송 쓰루(song through) 방식은 정교한 서사 전달에는 취약할 수 있으나 멜로디의 대립과 충돌, 중첩과 화합으로 극의 서사성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파리의 급진적 공화파 청년들의 항쟁을 소재로 하지만 이를 이루는 개별적 삶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신부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얻게된 장 발장은 나머지 생을 사랑에 헌신(코제트)하고 용서(자베르)함으로써 스스로 구원받는다. 반면, 사랑에 배신당한 팡틴은 세계로부터 내쳐지고(I dreamed a dream), 마리우스를 짝사랑한 에포닌은 그와 코제트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돕다가 목숨을 잃는다(A little fall of rain). 팡틴과 에포닌이 극에 등장하는 분량은 비교적 적지만 그녀들의 노래(I dreamed a dream/On my own)가 다른 어떤 노래들보다도 아름답고 강렬하게 남는 이유는 오직 그녀들만이 불가능한 사랑의 완결을 향해 끝까지 달려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 정신과 사랑의 교차 지점은 학생들이 항쟁 전야에 부르는 Red & Black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학생 운동가인 마리우스는 우연히 만난 코제트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자신이 이제껏 진정으로 살아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혁명을 향한 열의는 어느새 사랑의 열정으로 뒤바뀌고 어두운 밤(black)을 지나 동이 트는 세상(red)을 맞이하고자 하는 염원은 그녀가 없는 세상(black)은 상상할 수 없는 나의 불타는 영혼(red)으로 노래된다. 앙졸라는 이내 사사로운 개인의 삶보다는 더 큰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마리우스를 나무라지만 그 둘이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삶에 대한 희망이라는 하나의 줄기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우리는 동일한 멜로디와 Red&Black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다. 사사로운 삶들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혁명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자유롭지 못한 삶은 어쩌면 사랑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말미암은 것은 아닐까? 저마다 다른 멜로디로 다른 내일을 노래(One day more)하지만 누구도 그 ‘내일’을 보장할 수는 없다(Empty chairs empty tables). 홀로 살아남은 마리우스가 친구들의 죽음을 목 놓아 애도한 후 그가 외면했던 부르주아 가정으로 돌아가 코제트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결말이 씁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일을 약속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는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목숨 걸어 지키고 구출한 아버지가 있었기에, 그러므로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여전히 존재하기에, 혁명의 실패 후에도 우리는 어제를 기억하며 또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걸어볼 수 있을 것이다. 혁명과 사랑은 완결될 수 없고 다만 계속해서 진행됨으로써 존재한다. 이러한 점에서 실패한 혁명의 노래(Do you hear the people sing?)가 말미에 이르러 화합의 노래(Epilogue)로 탈바꿈 하는 것은 혁명의 진정한 의의가 체제 전복이 아닌 삶의 가치 수호에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앞서 ‘반항’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면서 비교적 논의거리가 많은 두 작품을 읽고자 하는 시도가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낭만적 (이 단어가 어째서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념을 혁명이나 반항이라는 진지함으로 포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본질은 사랑에 있음을, 그리고 꼭 그래야만 함을 나는 이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되짚었다고나 할까.

살아가는 매 순간은 혁명을 필요로 한다. 뒤집으면, 매 순간을 살아가기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 서로 사랑하며 즐겁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을 위해 혁명을 필요로 한단 말인가? 다시 카뮈를 불러오자면, 역사가 지속되는 한 부조리가 근절된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사상은 그만의 모순을 가지며 또한 새로운 억압을 낳는다. 이에 사상에 박제된 행동으로서가 아닌 인간의 몫을 지켜내기 위한 혁명 - 즉, 반항 - 만이 허용될 수 있다. 진정한 혁명은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어쩌면 이 시대의 비극은 사랑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이 한낱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유치하다고 치부되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곰곰 생각해본다. 곰곰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