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4일 목요일

홍어와 <짬뽕>

by 에스티

2001년 9월 11일 CNN을 통해 중계된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붕괴 장면은 이후 미국 거대 자본 영화에서 반복되고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의 탑이 무너질 때나 <아바타>에서 판도라의 홈트리가 미사일 공격으로 쓰러질 때 우리는 일종의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언맨3>에서 토니 스타크의 저택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스타트랙 다크니스>에서 거대한 우주비행선이 맨하탄에 불시착하면서 고층 건물들을 무참히 파괴할 때 이 장면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앵글을 통해 상호 유사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거대 상업 영화들에서 이 장면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클리셰일지언정, 그날의 강렬한 기억이 환기됨으로써 악당에 대한 반감과 주인공에 대한 정서적 일치감이 쉽게 확보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쯤 예리한 독자의 눈에는 이 글이 현란한 시각 효과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음이 발각되었으리라. 본론으로 들어가자. 문학이나 영상으로 재생산된다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9‧11에 버금가는 사건은 아마도 5‧18일 것이다. 90년대 중후반부터만 하더라도 <모래시계>, <꽃잎>, <박하사탕>, <오래된 정원>, <화려한 휴가> 등의 작품들이 오월의 광주를 그렸고, 이런 시도는 2000년 후반에 들어 <스카우트>나 <수퍼맨이었던 사나이>, 그리고 <26년> 등과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극판에서는 황지우의 <오월의 신부>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뿐 아니라 윤정환 작/연출의 <짬뽕>이 지난 10년간 공연되어 왔고, 정경진이 쓰고 고선웅이 연출한 <푸르른 날에>도 세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나는 여기서 이들 작품을 따로 검토하거나 그 우열을 가릴 마음은 없다. 이 작품들 모두 국가에 의해 희생된 젊은 청춘을 애도하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에 주목하면서도 시종일관 관객들에게 연극적 재미를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30년이 지나 간접적으로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광주는 결코 단순한 볼거리에 머물지 않는 무게로 다가온다. 이 두 작품의 미덕이기도 한 웃음은 이내 감정의 깊은 바닥까지 내려갈 준비를 요구하기 때문에 지독한 면이 있다. 또한, 장신부, 신작로, 그리고 오민호/여산 같은 피해자들이, 황지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나옴으로써 영혼은 죽어버린” 자신의 처지로 인해 그후로도 고통과 자기 학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관객들의 양심의 문을 자꾸만 불편하게 두드린다. 물론 <박하사탕>의 영호처럼 그날의 기억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켰다면 그 또한 피해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빨강’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이 작품들에 끌린 이유이기도 하다.




<푸르른 날에>(정경진 작, 고선웅 각색/연출)를 보러갈 무렵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북한에서 침투한 특수부대의 소행이라는 말들이 이런 저런 곳에서 다시 흘러 나왔고, 급기야 두 신문사방송 채널에서 이 내용이 보도되었다. 심지어 당시 남파된 특수부대원이었다고 주장하는 탈북자의 인터뷰가 방송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5‧18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사람들이 제기한 바 있었는데, 새 정부가 들어서고 5‧18 기념식과 관련된 문제가 재점화되는 시점에 맞춰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던 것이다. 이런 정황 속에서 “좌빨”, “홍어”와 같은 말들이 자주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홍어”는 전라도의 특산물을 이용해 그들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대표적인 일베식 용어인데, 그들이 그 말을 사용하는 방식은 작명 자체보다 더 거침이 없다. 내가 이 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일베 이용자—그들 스스로는 일게이, 일간베스트 게시판 이용자, 라는 매우 중립적인 이름으로 부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들을 벌레(蟲)로 분류한다. 그들이 털벌레인지 갑충류인지 구더기류인지는 마치 그레고리 잠자의 변화된 모습을 가늠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가 “홍어산란기”라는 제목의 사진을 아이돌 그룹 MissA의 멤버인 수지에게 트윗 멘션을 보낸 사건을 통해서였다. 그 사진은 수지의 실물 크기 입간판을 눕혀놓고 한 남성이 그 위에서 겁탈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배수지는 광주 출신이고, 영화 <26년> 개봉 당시 이 영화를 추천하면서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바 있는데, 이것이 모의 강간의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5‧18을 전후로 유포된 또다른 사진으로 여기선 당시 사상자들의 시신이 관에 안치되어 있는 사진에 “산지 직송 삭힌 홍어 배달”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들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확립된 의미를 해체하고 금기에 도전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전위적인 면이 있다. 다만 그들의 행위는 문화예술이 아닌 사회면에서 다뤄진다는 점이 문제다. 소속사는 성희롱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고, 홍어 배달과 같은 표현에 대해서는 광주 시차원에서 5‧18 민주화운동 역사왜곡/훼손 사례 신고를 받아 법적 대응해 나가고 있다. 북한 특수부대설을 제기했던 지만원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일베를 옹호하며 법적자문까지 나서서 해주고 있지만, 이제 일게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존중되어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기들이 경멸하는 그 민주화를 위해, 다시한번 황지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수한 피”를 흘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은 그저 감성팔이에 지나지 않는 말이리라.

<짬뽕>이 공연된 지난 10년 동안 5‧18은 기념식에 있어서 변화를 겪어야 했다. 대통령의 불참 외에도 무엇보다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방식이었다. 이 노래는 국가 기념식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2008년까지 기념가로서 제창되었지만, 이명박 정부에 들어 국가보훈처가 이 노래를 사용하는 것에 제동을 걸었고 급기야 제창이 허락되지 않고 식전 행사에서 관현악 합주로 연주되도록 했다. 2011년 기념식에서 “아침이슬”과 함께 “5‧18 판타지아”라는 제목으로 편곡된 곡은 한번은 장엄한 선율로 또 한번은 지나치게 빠른 템포로 변주되는데, 이 의도적인 변형은 그저 노래가 허락되지 않은 상황을 더욱 부각시켰다. 정권이 바뀌고 새 대통령은 광주를 찾았고, 노래는 제창은 아니지만 합창단의 합창으로 불려졌다. 기념식을 찾은 광주 시민들에게는 합창이나 제창이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합창은 부르고자 하는 사람을 막는 것이 아니라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부르지 않을 자유를 주었다. 노회찬 ‘전’의원은 여느 민중의례에서처럼 주먹을 흔들며 노래했고, 김문수 도지사는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노래했다. 그 옆의 안희정 도지사는 태극기를 흔들며 노래했다. 야당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던 시절 가사를 보면서 따라 부르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던 현재의 대통령은 이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부르지 않은 채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한다. 방송 중계에서는 단 한장면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직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보훈처는 이 노래가 불려지는 맥락과 그것을 부르는 방식에 덧입혀져 있는 빨간색이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행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 노래가 당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그와 함께 들불야학을 운영하던 중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5‧18에 대한 최초의 뮤지컬이기도 한, <넋풀이 -빛의 결혼식>에 삽입된 노래라는 사실은 그저 연극사적 의의만 지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가 이 노래를 부르게 했지만, 이제 국가가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