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피’를 위한 축제: 2013 한․일 공동제작 연극 <아시아온천>
6월 11일(화)~6월 16일(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정의신 작, 손진책 연출
by 이흔정
‘어제도’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아시아의 작은 섬. 이 작은 섬 마을사람들은 언제 시작됐는지 모를 나름의 전통과 규율을 따르며 더불어 살고 있다. 그런데 이 평화롭고 조용한 섬에 느닷없이 외지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온천수가 솟는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이다. 이로써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은 저마다 추구하는 욕망과 가치로 부딪히고 어제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섬에 리조트 사업을 시작하려는 외지인 아유무와 카케루는 이 마을의 중심인물 대지에게 땅을 팔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척박한 황무지에 사탕수수를 기르며 땅과 함께 자라난 대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대지네를 비롯한 토착민들에게 어제도는 단순한 ‘토지’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연극 아시아온천은 이런 토착민과 외지인 사이의 갈등, 전통과 돈이라는 가치의 대립구도를 그리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나 메시지자체는 그다지 신선하지도 않고, 어떤 결말을 맞을지 예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시아온천>을 스토리의 측면에서만 감상하는 것은 공연을 반도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 글에서 다 풀어내지 못할 많은 얘기 거리를 갖고 있다. 그 중에서 먼저 정의신이라는 작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신은 1986년, 그가 29살 청년이었을 때 <사랑스런 미디어>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중견극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희곡집은 2007년에 겨우 한국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리 익숙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정의신의 희곡들에는 대부분 신체장애자, 게이 등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등장하고, 그는 섬세하고 따스한 필체와 유머로 그들의 삶에 격려를 보낸다. 그가 마이너리티의 삶에 초점을 두는 것은 재일한국인이라는 작가의 배경이 작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배경이 그의 작품세계를 일면 편협하게 만드는 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그런 배경 때문에 그가 마이너리티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그들에게 보내는 격려가 더욱 설득력을 갖고 관객의 가슴을 울리지 않나 생각한다.
<아시아온천>은 그가 여태껏 재일교포문제를 중점으로 써온 작품들에 비해서는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땅’이라는 소재와 ‘토착민과 외지인’의 갈등에서 작가의 배경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할머니와 단둘이 자랐는데, 그의 할머니는 14살에 사진으로 본 게 전부인 할아버지를 만나러 일본으로 건너와 눈감는 날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고 한다. 정의신은 한국에서 출판한 희곡집 서문에서 “할머니를 대신하여, 나의 말들이 고국의 땅을 밟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말들은 할머니의 슬픔과 기쁨으로 빚어낸 것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그에게 ‘땅’은 어떤 의미일까. 주인공 대지의 저항이 지금 우리들 눈에는 고루한 늙은이의 고집스러운 억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어쩌면 작가는 대지처럼 지키고 싶은 땅을 갖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는 어느 나라 땅인지 명명되어 있지 않은 ‘어제도’라는 땅의 처지가 작가 자신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는 ‘땅’을 오로지 돈으로 환산해버리는 오늘날 세태에 반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보기에 ‘땅’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온천이 솟아나길 기대하며 끊임없이 땅을 파는 세 남자 우마조, 도조, 우시조. 정착할 곳 없이 수레를 끌고 떠도는 병아리와 원숭이. 리조트를 건설하려 섬을 인수하려는 카케루와 아유무. 그리고 후유와 대지의 대립까지 어제도의 모든 욕망과 갈등은 땅에서 비롯된다. 섬의 실질적인 땅 주인은 대지의 옛 연인 후유인데, 그들 사이에는 사생아 하루오가 있었다. 하지만 하루오는 대지와 거북이(부인) 사이에서 길러지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서 자살한다. 대지는 자살한 사람은 조상이 묻힌 성스러운 땅에 묻힐 수 없다는 마을의 전통에 따라 하루오를 섬 한켠에 묻는다. 이에 아들의 유골을 제대로 묻어줄 수 없었던 후유는 오랫동안 원한을 품고, 대지가 그토록 아끼는 섬을 외지인들에게 팔아 넘김으로써 앙갚음을 하려 한다. 그러나 대지가 외지인들과 대립하는 반면, 딸 종달이는 외지인 아유무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종달이와 아유무는 모두가 평화롭게 공생할 길을 찾고자 하지만, 대지는 그들의 사랑에도 결사 반대한다. 결국 그 고집은 딸을 죽음으로 내몰게 되어, 대지는 또다시 자살한 딸의 유골을 어떻게 묻을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내가 묻힐 무덤 한 평조차 ‘돈’으로 사두어야 하는 사회지만, 그럼에도 어디에 묻히냐 하는 것은 단순히 돈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고국의 땅에서 가족들 곁에 묻히길 바랄 것인데, 재일한국인인 작가처럼 ‘경계인’들에게는 그 조차도 문젯거리가 아니겠는가.
이 ‘경계’라는 문제는 <아시아온천>이라는 희곡이 공연으로 무대화된 방식과 결부하여 생각해보면 더욱 재미있다. 숙련된 연출가 손진책은 예술의 전당이라는 전형적인 프로시니엄 무대 위에 ‘마당놀이’ 판을 만들었다. 무대 위에는 장구와 북, 색소폰과 드럼 등 각양각색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들과 배우들이 모두 빙 둘러앉아 있다. 배우들은 자기 차례가 되면 무대 한 가운데로 들어와 연기를 펼치고는 다시 돌아가 의자에 앉는다. 그들은 그 판에 들어오고 나갈 때, 아주 잠깐 멈추어 설 뿐이다. 이런 방식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노련한 연출가 손진책의 솜씨와 극단 미추 배우들 덕분에 이런 설정이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공연에 녹아 들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또한 배우들이 객석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경사면을 만들어 연결시킴으로써 마당놀이의 개방적인 성격을 한층 극대화 시켰다. 이렇게 우리 전통적인 공연형태에서는 극공간과 현실공간이 서로를 넘나든다. 아주 경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게 아주 달라서 서로 만날 수 없는 분리된 국면이 아닌 것이다. 이런 마당놀이 형식을 차용한 것은 토착민과 이방인을 어떻게든 구분 지으려 하는 인간 본성을 비유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 읽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토착민과 이방인들의 그런 갈등을 지켜보는 동안, 이쪽도 저쪽도 속할 수 없는 ‘경계’에 놓인 이들의 외로움을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탈근대화 시대며, 탈경계성이며 듣기 좋은 말들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지만, 인간 내면 깊숙이 타자를 상정함으로써 정체성을 찾으려는 성질은 여전하고 또 그것을 무조건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성질이 양날의 칼처럼 우리 삶에서 무수한 비극을 낳게 한다는 사실이 씁쓸할 뿐이다. 비단 재일교포 같은 국적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선을 긋고 타자를 만들어내는 우리 삶이 얼마나 각자를 외롭게 만드는가.
극은 대지와 카케루가 종달이와 아유무를 위해 진혼굿을 벌여 영혼결혼식을 올려줌으로써 서로 화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굿’이라는 요소는 이 작품이 원작으로 삼은 <푸르고 아름다운 아시아>에는 없던 것인데, 한국 공연에 맞추어 극본을 고쳐 쓰면서 삽입되었다. 작가는 한바탕 굿판을 벌임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 모든 ‘외로운 피’를 위한 위로의 축제를 열고 싶었던 것 같다. 놀이성과 축제성을 한껏 살리려 했던 탓인지 일본 공연의 성격과는 사뭇 다르게, 일본 배우들이 한국어로 관객들에게 퀴즈를 내기도하고, 마을에서 굿판을 벌인 후에 그 음식을 관객들에게 배우들이 돌아다니며 나눠주기도 했다. 이런 단편적인 방식으로 관객과 소통을 꾀하는 것은 자칫 극을 가볍고 조잡하게 만들 위험이 있지만, 2층에 앉아있던 나로써 1층 관객이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니 축제극으로 만들고자 했던 연출의 의도는 꽤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작품 제목인 온천은 극이 끝날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공연을 보고 나오는 마음은 온천수처럼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