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3일 일요일

불안한 춤

임승태

인간이 사라진 무대에 로봇이 서 있다. 그리고 움직인다. (하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그 말이 좀 어색하지만 작가가 그것을 '춤'이라고 부른 것은 정당한 것 같다. 춤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은 '춤추는 풍선 인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 형상을 하지 않은 로봇의 움직임을 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는 아직 쉽지 않지만 받아들여 보겠다.  

나는 고든 크레이그가 이 광경을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그래, 21세기에는 내가 꿈꿨던 위버마리오네트가 마침내 인간 배우를 대체하는구나, 라며 무릎을 탁 쳤을까. 아니면 이마를 치면서, 아, 로봇도 인간 배우 만큼이나 통제가 안 되는구나, 라며 탄식했을까. 

관객과의 대화(관대) 시간에 작가의 말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 로봇이 인간 배우를 대체하더라도 완전한 제어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로봇은 인간 배우와 달리 제어가 되지 않더라도 연출가가 로봇을 향해 나쁜 감정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거기서 질문이 생긴다. 제어되지 않는 로봇의 의외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인간 배우의 의외성 역시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술관 '전시'에 더 적합한 퍼포먼스라고 느꼈다. 관람객이 자신이 보고 싶은 시간 만큼만 보고 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지연 시간 포함) 한 시간 가까이 객석에서 꼼짝 않고 봐야 할 공연이었는지, 끝까지 본다고 달라지는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는 불멍, 물멍하듯이 나는 로봇의 회전 운동을 마치 해파리의 춤을 보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고, 로봇을 움직이는 데 사용했을 법한 프로그래밍 언어, 혹은 수식이 마치 영화 <매트릭스>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록 그것을 단 한 줄도 알지 못하지만.  

사실 음악은 공연장에서 듣기에 괜찮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바, 그 음악은 공연 중 연출가가 직접 라이브로 연주를 했다고 한다. 비인간을 내세운 공연에서 인간의 직접적 개입으로 만들어진 부분이 가장 좋았다니, 내가 너무 낡은 '공연성'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관대에서 반복적으로 나온 얘기가 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고. 공연 도중 있었던 오작동, 걸려 넘어짐 등의 오류에 대한 해명이었다. 공연장에 불러 놓고 할 얘기인가 싶었다. 중간시연회도 아니고 그것도 무려 SPAF에서 말이다. 나중에 다시 보니 이 공연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와 아트랩코리아의 중장기 협력 프로젝트인 <예술 X 기술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는 사전 고지도 있었다. 그러니 미리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은 내 탓이지 미완의 공연을 나무랄 수는 없다. 게다가 '인간' 공연도 언제나 수정과 보완이 이뤄지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로봇이 하든 인간이 하든 공연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아직 인간이 무대에 있는 공연을 더 보고 싶다. 무서운 속도로 무인화가 진행되고 있는 서울에서 '공연예술제' 만큼은 대세를 거슬렀으면 좋겠다. 





2024년 9월 25일 수요일

난 아가멤논이 아니다.

제목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너는 발각된다.

‘난 아가멤논이 아니다.’

이름을 대고 싶어지는가? 너는 극 중 인물이다.

‘난 아가멤논이 아니다.’

이름을 묻고 싶어지는가? 너는 바깥 인물이다.

“난 아가멤논이다.”

너는 아가멤논이 아니다.


연극 <용서되지 않는> 속 아가멤논은 인물보다 역할이다. 의자 앉기 게임을 하듯, 여럿이 아가멤논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 다만, 이 놀이에는 엄중한 규칙이 있다. 겨루지 말 것. 미는 대로 밀려나는 사람만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될 아가멤논은 아니다. 그는 정해져 있다. 코러스와 배우는 양분되나, 입구 부근 『인물관계도』를 자세히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초장에 누가 코러스이며 배우인지 알기 어렵다. 최민서 코러스가 의기양양하게 아가멤논을 선언해 이목을 집중시키는 중, 무대에 늘어선 무리는 적극적으로 비소한다. 그러다 전통적 아가멤논을 선보이는 김은수 배우가 들어오자, 분주하게 가라앉는다. 이 비밀스러우나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 판은 최지연 아가멤논 입장 전에도 한바탕 벌어진다. 조롱에 드는 말은 아가멤논 대사와 같아, 연기자들의 연기 말고는 흉내의 목적을 정할 방법이 없다. 둘째 판에서는 클뤼타이메스트라에 의해 여러 번 조롱하기를 지시받는데, 채 오지도 않은 아가멤논을 재연하는 것으로 보였다.

무대를 둘러 잠근 흰 천에 얼굴을 파묻는다 해 보자. 천은 잠깐 가면처럼 얼굴을 들추겠지만, 이내 덮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이고 들이박는다면, 천은 얼굴대로 주름 잡혀 곧 선을 팔 것이고, 선이 그려진 흰 천을 본이라 생각지 않을 수 있을까? 코러스는 운명을 알고, 마련하고, 물러난다. 바뀌는 얼굴에 발맞춰 뛰고 아가멤논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다. 결국 따라잡을 거북이 앞지르지 않으려고 잠자코 기다리는 아킬레우스 같은, 역설보다 역설 같은 신세다.1)

앞뒤로만 붙는 두 아가멤논은 죽을 때도 의자를 점선 삼아 접혀 죽었다. 반면 이피게네이아 둘은 앞뒤로 접혔다가 옆으로 펼쳐 죽는다. <용서되지 않는>의 코러스는 방관자로 상정되고, 잘 웃는다. 서은지 이피게네이아 다음으로 아가멤논의 회상을 받는 이채은 이피게네이아의 얼굴에 웃음기라곤 없다.

운명의 비정한 점은 딱 한 면만 앞장으로 둔다는 점이다. 앞장은 사람이기도, 사태이기도 하지만, 사람일 때 유독 얇아진다. 두꺼운 장보다 얇은 장이 넘기기에 번거롭다. 진한 글씨로 들어찬 앞장 아가멤논에 뒷장 이피게네이아, 카산드라가 차례로 쌓여 있다. 아무도 넘겨 보지 않을 것을 알아 이피게네이아는 세로 종이 더미 사이에서 가로로 두 손 꼭 붙잡고 섰다.

카산드라는 등장인물 중 제일 요란한데, 지면에는 조용히 적힐 뿐이다. 아무리 시끄러운 “삐-”소리라도 ‘삐’로만 기록된다. 담배를, 방울을, 비명을. 어떤 소리를 내도 소용없어 자리라도 길게 차지하자 하고 다음 면으로 넘는다. 안 넘기고 못 배기게 악을 쓴다. 그가 끌려가 죽은 후에도 악기 소리가 자리를 지킨다. 자못 경건하다. 죽음이 풍족한 극이라지만, 이만큼 무겁고 심란한 죽음 묘사는 없었다. 여태껏 편안하게 목격해 온 바깥을 노려보는 장면이었다.

끝쯤, 죽은 이피게네이아들과 카산드라가 산 엘렉트라를 안아 준다. 연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마주 잡은 손도, 내어준 품도 다 따뜻했다. 경쾌한 등장가, 댄스 크루다운 의상과 대형,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모를 불협화음, 그리고 오이. 이처럼 극은 전반적으로 밝고 기운차다. 그러나 이 밝음에 온기를 덧댄 것은 휴대전화가 울리더라도 째려보지 말고, 기다려 주자는 공연 안내 말부터 시작된 연대 의식이었다.

역할에서 비킨 배우는 코러스 무리에 낀다. 양분되어도 돌아 돌아 모두가 코러스다. 배우를 맡으면 진지하다가도, 코러스로 돌아오면 그냥 친구들끼리 재미 삼아 ‘해 본’ 양 연기한다. 희곡 텍스트에서 “난 아가멤논이다.”하는 첫 대사 또한 역할과 연기자를 떼어놓으려는 시도가 배어 있어, 더 흥미로웠다.

두 동강 난 오이와 같이 갈린 줄서기는 오레스테스가 오이(디푸스)보다 불행하다는 쪽으로 결판난다. 결과보다도 줄 서는 무리의 발랄함이 돋보였다. 고정훈 코러스의 표정과 최재욱 코러스의 몸짓을 필두로 무대를 채운 연기자들의 활력은 방관자마저 영입할 기세였다. 그래서 외려 관객 참여로 보이는 장면이 다소 맥없게 느껴졌다. 먼 이야기라 가벼이 결정했겠지만, 코러스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극이 방관자를 꼬집게 하고 싶었던 것인지, 끌어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인지 되짚어보면 좋겠다. 전자였다면, 희곡 텍스트의 건조하고 냉소적인 구석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우려했었던 카산드라, 오레스테스와 퓔라데스의 언어 표현은 전태유 카산드라의 절도 있는 호루라기와 하지호 오레스테스, 이원빈 퓔라데스가 적절히 주고받은 어조로 정돈되었다.  우려를 배신해 주어 고맙다.

귀환한 최지연 아가멤논을 만취 상태로 설정하고, 붉은 하이힐을 소품으로 가져온 것도 재미있었다. 코러스가 ‘재연’할 때에도 이 하이힐을 앞세워 더 그랬다. 붉은 융단이 마중 나가기 전부터 붉음을 밟도록 마련한 듯했기 때문이다.

의자에 올라서 항변하는 텍스트상 지시는 <용서되지 않는>이 내뿜는 에너지와 꼭 맞지는 않았으나, 공유림 엘렉트라의 곧은 톤과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사후에 오레스테스와 재판으로 겨루어, 진다. 그 잘난 아폴론이 내세운 고릿적 논리가 아테나의 선입관에 맞아떨어져 지고 만다.2) 죄를 물으라면 클뤼타이메스트라도 떳떳하지 못하나, 처분이 못마땅한 것은 어쩌지 못하겠다. 딸을 제물로 내놓은 인간에게 복수하여 딸의 원수를 갚고자 행했음에도 아무도 그의 편에 서지 않는다. <용서되지 않는> 속 이피게네이아조차 엘렉트라를 안아주었다. 김경수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이러한 생각을 건드리는 곡을 했다.


<진리는 나의 빚>에서 살풍경하고 견유적인 세계를 보았다. 나는 이 세계가 퍽 안락하여 한참을 둘러보았다. “그래. 더 늦기 전에.” 문을 닫는 소리였다.

<용서되지 않는>에서 “그래. 더 늦기 전에.”하고 문을 여는 세계를 보았다. 나에게는 썩 나가라는 불호령이었다. 

환대하지 않지만 머무름을 허하는 곳과 환대하지만 머무름을 금하는 곳. 

두 곳이나 들른 나는 운이 좋았다.

‘용서되지 않는’은

‘용서할 수 없는’

‘용서될 수 없는’

과 비교하면 드문 어구다. 그래서 헷갈리기 쉽지만,

‘용서할 수 없는’이 감정(感情)에, ‘용서될 수 없는’이 감정(鑑定)에 기울 때,

<용서되지 않는>만이 감정의 양면을 지닌다.


장혜경이다. 


1) 제논의 역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2) 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용서되지 않는 

 제 32회 젊은연극제 평택대학교 연극영화과 참가작

2024년 6월 16, 17일 대학로 공간아울

출연 고정훈 공유림 김경수 김은수 서은지 이원빈 이채은 전태유 최민서 최재욱 최지연 하지호

원작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 각색 임승태 <진리는 나의 빚>

연출 안성환 / 조연출 강정희 전우진 / 무대감독 허태환 / 기획 강민서 박규민 / 기획보조 정수아 / 음향 김예인 박재원 / 조명 이재형 / 조명디자인 백은열 / 무대디자인 김혜성 / 무대 안성주 홍승민 박경두 / 의상,분장,소품 조혜은 김다혜 김주미 / 진행 김가연 박성실 최해안 / 촬영 정진욱 홍윤제 / 지도교수 서나영


사진: 임승태